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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ginner's Guide and History - How to Listen to the Blues

by Bruce Eder

음악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기적과도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 아마도 어떤 쟝르의 어떤 시대의 음악이든, 오늘날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더 큰 음반 선택 기회가 있다. 이런 말은 아주 멋진 것처럼 들린다 - 다음과 같은 때를 제외하곤 말이다 :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쟝르의 음악을 둘러보고 이렇게 물을 때 :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당신이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어떤 특정 음악 쟝르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 음악을 만들어낸 사람들에 대해 알아 나가고 그 사람들과 그들의 청중들이 그들의 음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아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는 다른 종류의 음악처럼 블루스에 접근하는 것인데 꽤 간단한 방법이기도 하다 - 해당 음악에 입문하기 쉬운 앨범을 찾고(예를 들자면 클래식에서라면 독일 낭만파 레파토리를, 영국 락에서라면 비틀즈를 등등) 해당 분야의 주된 연주자나 그룹을 들어보고 그 음악을 소화하고 라이너 노트나 참고 서적들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읽어 보라.

그러나 블루스는 -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블루스의 대부분은 백인들이 블루스를 발견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이전에 레코딩됐다 - 당신이 LP나 CD에서 들을 수 있는 다른 대부분의 대중 음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차이는 이런데 있다 : 블루스가 태동한 방식, 블루스가 요구된 이유 , 블루스가 레코딩된 방식, 레코딩된 블루스가 시중에 출시된 방식, 그리고 청취자들에게 수용된 방식.

[초심자들에게] 블루스의 유산이란 일반 청취자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다. 그러나 최근까지 블루스의 유산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특히, 락 청취자들에게] 락의 관점에서 블루스를 듣는다는 것은 레코딩이나 음악 사업에 표준적인 것이라곤 거의 없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을 그리고 심지어는 미국 최남부가 지독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시절에는 악기조차도 표준적인 것이 없었다. 일단, 1920년대와 30년대에 등장한 블루스는 기타가 아닌 밴조 음악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몇 몇 밴조 연주자들은(혹은 밴조 타입의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20년대에 레코딩을 했고 그 음악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음악과는 아주 다르다(그리고 아주 멋진 음악이다). 그러나 심지어 기타조차도 우리가 아는 표준적인 기타가 아니었다 - Big Joe Williams는 9현 기타로 유명했는데 6현 기타를 개조해서 위의 기타줄 셋을 12현 기타처럼 두배로 만들어 놓았다 ; 최초로 레코딩한 남성 블루스 싱어인 Papa Charlie Jackson은 밴조 형태의 몸통을 가진 6현 악기를 사용했는데, 이 악기는 아주 특이한 울림을 갖고 있었다 ; Leadbelly는 그의 12현 Stella 기타로 유명해졌는데 (12현 Stella 기타는 20년대 남부에서 아주 인기가 좋았다) Leadbelly가 뉴욕의 American Record Company에서 첫번째 상업적 레코딩을 했을 때, Leadbelly는 대부분 6현 악기로 연주했다.

블루스 광신도들을 제외하고는, 당시 컨트리 블루스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기타는 철로 몸통을 만들고 원뿔형의 공명통이 내장된 National Dobro 기타였다는 사실은 거의 잊혀져 버렸다.(이 악기는 일렉트릭 기타와 아주 흡사한 소리를 낸다) C.C.R.의 앨범 <GREEN River>의 표지를 보면 John Fogerty가 이와 비슷하게 생긴 악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Dire Straights의 Mark Knopfler도 이 악기를 사용한다 - John Lennon 역시 그의 앨범 <SOMETIME City York New in>에서 그의 저항 가요 "John Sinclair"를 부를 때 이 악기를 아주 멋지게 연주한다.

더군다나 오늘날 블루스를 감상한다는 것은 음악 감상에 관련한 상당히 많은 상식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심자들에게] CD나 LP로 블루스를 듣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1956년 이전에는 블루스 “앨범”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20년대부터 50년대까지의 대부분 블루스 청취자들로선 좋아하는 뮤지션의 여러 곡을 한번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코드, 특히 블루스 레코드는 그런 방식으로 출시되거나 배포된 적이 없다. 사실 1930년대에 어떤 사람이 동일한 블루스 뮤지션의 레코드 5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수완이 대단한 팬이고 그 레코드가 모두 좋은 형태를 갖고 있고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상태라면 그는 정말이지 기적의 사나이일 것이다.
Singers and Songs, Not Albums

[초심자들에게] LP(Long Playng) 앨범이란 1948년까진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때까진 모든 레코드들은 깨지기 쉽고 무거운 78회전 shellac(역주 : 니스의 원료인 물질) 디스크의 형태로 출시됐고, 한 면에 최대 연주시간은 3분 30초 정도였다. 물론 당시에도 “앨범”은 있었다. 아주 큰 사진 앨범 같은 형태로 78회전 레코드를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앨범은 클래식과 당시 최고의 팝스타를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60년대 전후로 도입되기 시작한 LP(long-playing) 앨범 역시 클래식과 재즈 그리고 당시의 유명 컨트리 & 웨스턴 뮤지션과 팝 음악을 위한 것이었다. 블루스는 45회전 싱글이나 78회전 레코드에 머물러 있었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78회전 레코드는 1950년대 말까지 계속 생산됐다)








몇 몇 블루스 뮤지션-- Leadbelly, Pink Anderson, 그리고 가장 그 중 유명했던 Piano Red의 작품들이 앨범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런 앨범들은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라는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였을 뿐이다. Leadbelly의 추종자는 오직 백인 포크 매니아에 국한되어 있었고, 이들은 45회전 레코드보다는 앨범을 구매했다.(그리고 Folkway Records는 45회전 시장에 나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Pink Anderson은 상대적으로 보다 세련된 재즈 청취자들을 거느리고 있고 LP 포맷에 적응하고 있었던 Prestige Records의 자회사offshoot인 Bluesville에서 레코딩했다. Piano Red는 RCA 자회사 레이블인 Groove Records에서 앨범을 발매했는데 한 면에는 1955년 5월 Atlanta's Magnolia Ballroom의 실황을 다른 면에는 이전에 출시한 싱글을 수록했다.



그러나 Red의 작품은 다른 블루스 뮤지션들 중에서도 아주 독특하다. 대부분의 블루스 레코드들은, 가난한 백인 약간 그리고 농촌과 도시의 가난한 흑인을 타겟으로 삼았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LP 레코드를 사지 않았다 -- 그들은 LP 레코드를 살 능력이 없었고 진짜 가난한 일부는 78회전 플레이어에서 업그레이드조차 하지 못했다. 이 덕택에 78회전 레코드 포맷은 50년대 말까지 근근히 유지될 수 있었다.

Chess Records 뮤지션 중 최고의 스타였고 블루스 사상 대중적인 스타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인 Muddy Waters의 첫 번째 “앨범”은 1958년에야 나왔는데, Muddy Waters가 Chess에서 일한지 11년만의 일이었다. 바로 이 앨범, “The Best of Muddy Waters”는 1948년부터 1955년까지 나온 싱글을 모아 놓은 것으로 새로운 곡은 없었다.

50년대엔 기존의 싱글로 구성된 블루스 앨범은 거의 없었고 콘서트 실황은 아예 없었다. Muddy Waters 역시 첫번째 앨범이 나온지 2년 뒤인 1960년에서야 그의 새로운 레코딩이 담긴 첫번째 앨범 “Muddy Waters Sings Big Bill Broonzy”을 내놓았다. 그리고 “Muddy Waters Sings Big Bill Broonzy”는 한때 그를 이끌어주었던 Big Bill Broozy의 곡으로 채워져 있다. Muddy Waters가 자신의 곡이 담긴 앨범을 낸 것은 1967년 “Muddy, Brass, and the Blues”가 처음이다. 그가 Chess에서 시작한지 19년이 지나서, 그리고 Chess 레이블에서 나온 그의 마지막 앨범이 나오기 겨우 9년 전의 일이다. Chess에서 Muddy Waters의 동료였던 Howlin' Wolf의 경우 1972년 나온 “Back Door Wolf”가 새로운 곡이 담긴 첫번째 앨범이었는데 그가 죽기 겨우 4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까지 나온 그의 앨범은 모두 싱글 모음이거나 그의 유명한 곡들을 재레코딩한 것이었다. 그리고 B.B. King의 첫번째 두 앨범, “Singin' the Blues”와 “The Blues”는 기존 싱글곡들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그가 소속되어 있던 레이블 Crown Records에서는 이 앨범들은 발매하지 않다가, B.B. King이 다른 회사와 계약하고 나서야 이 앨범들을 발매했다. B.B. King이 레코딩하기 시작한지 16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진정한 첫번째 앨범 “Live at the Regal”이 1965년에 발매되었고, 그의 첫번째 스튜디오 앨범은 2년 뒤에야 나왔다.

그리고 Charlie Patton, Robert Johnson, Blind Blake, Blind Lemon Jefferson, Barbecue Bob와 같은 블루스 뮤지션들 모두 이차대전 이전에 사망했고, 한 번에 두 곡이상을 출시한 적이 없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특히 락 청취자--들은 앨범 전체를 듣는다고, 보통 한 디스크에 열 곡 혹은 그 이상이 함께 들어 있는 앨범 전체를 듣는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락 청취자들의 관습처럼 앨범 전체를 듣는다는 생각은 Muddy Waters와 B.B. King의 초기 레코딩, Howlin' Wolf의 거의 대부분, Charlie Patton, Robert Johnson 그리고 이 두 사람과 동시대에 활동한 연주자들 모두의 레코딩을 들을 때 제껴두어야만한다. 바로 이런 사실은 1964년내지는 1967년 이후에 우리가 앨범을 듣는다는 것에 배워 온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빨라봐야 1964년 내지는 1967년 쯤에서야 Beatles, Beach Boys, Rolling Stones, Bob Dylan 등이 앨범이라는 단위를 음악 형태로 확립했기 때문이다.

Blues Roots

앨범이 아닌 개별 곡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블루스맨의 레코딩 경력의 중심이었고, 싱글은 일반적으로 여러 달 간격으로 출시되었다. 따라서 청취자들이 블루스맨의 음악을 접할 때는 몇 시간이 아닌 몇 년이라는 기간을 소요한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블루스를 들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기 쉽다 : Papa Charlie Jackson 같은 2차 대전 이전에 활동한 연주자의 음악은 두 시간 정도 분량의 레코드에 담겨 있지만, 그는 자신의 스타일과 레퍼토리를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두 시간이 아닌 십수년 간 동안 발전시켜 왔고, Papa Charlie Jackson은 수백 곡을 연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Papa Charlie Jackson보다 좀더 오래 살았던 Blind Willie McTell이나 Bukka White 같은 뮤지션들은 20여년간 한 번에 4곡 내지는 6곡 정도를 레코딩했다. Tampa Red는 1927년부터 1953년까지 한번에 4곡씩 300곡 이상을 레코딩했다. 한번에 앨범 하나 정도의 분량을 레코딩해달라고 요구받기 전까지 Tampa Red는 줄곧 그렇게 해왔다. Big Bill Broonzy는 최전성기에 일년에 24곡 정도를 레코딩했다 -- Big Bill Broonzy는 30년대 후반 내내 이런 페이스로 레코딩을 했다. 그러나 그런 노래들은 각각 개별 레코드에 담겼고, 대중들은 한번에 두 곡씩 들을 수 있었다.

오늘날 청취자들이 만나게 되는 블루스 뮤지션들의 곡들이 함께 묶여 있는 것인데 이런 형식이란 몇몇 제작사 측에서 이 곡들이 나온지 몇 년 혹은 수십 년 뒤에 이 곡들을 같은 컬렉션에 묶어 두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 뿐이다 : 한편으론 청취자들이 접하게 되는 LP와 CD란 편리한 것이기도 하지만, 앞에서 본 맥락에서 본다면, LP와 CD는 원래 블루스 곡의 기원과 목적을 왜곡한다. 한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그냥 한 앨범으로 포장되었을 뿐 일관된 체계를 이루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첫번째 블루스 앨범이 출현하기까지 거쳐 온 변화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발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정의 가능한 음악적 형식으로서의 블루스는 20세기로 막 들어서는 즈음에 W.C.Handy의 음악에서 등장했다. 물론 블루스가 그 뒤 10 동안에는 상업적인 성공 가능성을 가진 쟝르가 되진 못했지만 말이다. 당시에 블루스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랙타임이나 novelty song, 그리고 다른 레파토리들과 함께 블루스를 연주했던 뮤지션들이었는데 대부분 Minstrel Show(역주 : 백인들이 얼굴을 검게 칠해 흑인으로 분장하고 흑인 노래를 부르는 쇼)나 약장사들이 벌이는 쇼나 카니발에서 연주하거나 미국 최남부(역주 : Deep South - 죠지아, 앨라바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주)의 작은 흑인 마을에서 연주했다.

블루스는 독특한 음악이다. 블루스는 절망에서 생겨났지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스펠과 영가 역시 유사한 사회적 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가스펠과 영가는 블루스와는 다르게 작용한다. 가스펠과 영가는 구원, 천벌, 우주에서 인간의 자리 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블루스는 지상(地上)의 문제와 관련되며 왕왕 더 초라한 모습을 띄고 있다. 더욱이 블루스는 비탄의 근원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청취자의 기분을 풀어주는 만들주는 효과가 있다 : 고양되거나,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을 풀어주고 언제나 더 행복하게 해 준다.

이것이 블루스가 너무 슬프고 비관적이라는 이유로 블루스를 거부하는 사람들(특히 흑인 청취자들)이 20세기 중반 가장 유명한 블루스 작곡가 Willie Dixon을 예외적인 경우로 거론하는 이유이다. 이런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Dixon은 “블루스는 행복한 음악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참이다 -- 만일 당신이 20년대나 초기 30년대의 훌륭한 컨트리 블루스나 60년대 후반의 일렉트릭 블루스를 듣는다면 블루스에 담긴 익살, 악기와 목소리의 어울림, 그리고 이것들 모두가 어우러진 노래가 내놓는 전체적인 효과를 들으면서 행복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블루스 곡은 번민의 피난처와 같다. 청취자나 작곡자를 번민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건간에 말이다.

20세기 초반, 이런 사실은 전혀 미스터리가 아니었다. 레코드 회사들은 앨범을 살만한 흑인 고객층을 확인하자마자 레코드 회사들은 블루스를 쾌락이 넘치는 음악으로 간주했다. 기묘하게도 블루스가 레코드로 처음 등장한 것은 여성 블루스 싱어들이었고 이때 레코딩된 노래들은 상당히 upbeat 형식의 노래들이었다.

Mamie Smith (1883-1946)는 "Crazy Blues" 를 Okeh 레이블에서 출시하면서 “블루스”라는 용어를 1920년대 대중 음악 문화계에 소개했다. Mamie Smith가 출시한 레코드들은 한달에 7만5천 카피가 팔렸는데 당시에는 엄청난 숫자였고, Okeh 레코드는 이에 고무되어 “블루스”라는 이름을 달고 초기 블루스 사운드를 담은 레코드를 출시했다. 그러자 곧 다른 레코드 회사들 역시 Okeh 레코드의 성공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1920년 여름 즈음에 Arto에서 Lucille Hegamin이 레코딩했고 곧이어 Lillyn Brown이 Emerson에서 Alberta Hunter가 Black Swan 레이블에서 레코딩했다.

이런 레코드 모두를 “인종 음반 Race Records”이라고 부른다. “인종 음반 Race Records”라는 말은 이 레코드들이 흑인 청취자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안전하고 보다 점잖게 부르는 말이다. Okeh는 이런 이름으로 시작했다 -- Okeh는, 미국에서 어느 정도 청취자를 가질 수 있는, 모든 지역의 민속적이고 대중적인 음악이랄 수 있는 상당수의 음악을 레코딩했다. 그러나 Okeh는 그들이 “인종 음반”이라는 이름을 걸고 등장하기 전까지는 흑인 청취자를 위한 음악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주저하곤 했다. 그리고 “인종 음반”이란 이름은 40년대 후반까지 음반 산업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런데 스타일에 있어 가장 초기에 널리 수용된 블루스 레코드는 1923년 발매된 Bessie Smith'의 “Down Hearted Blues”였다. 이 시기에 레코딩한 남성 블루스 싱어들도 있었다. 기타 연주자 Sylvester Weaver 그리고 가수 겸 기타 연주자 Ed Andrews 같은 사람들로 Ed Andrews는 1924년 "Barrelhouse Blues"라는 곡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히트곡을 내놓으면서 실질적으로 블루스 시대를 열어 놓은 사람은 Papa Charlie Jackson (c. 1885-1938)이었다. 그는 당시 "Papa's Lawdy Lawdy Blues"와 "Airy [aka "Hairy"] Man Blues" 같은 곡을 내놓았다. 얼마 후 Cannon's Jug Stompers의 리더였던 Uncle Gus Cannon (aka "Banjo Joe") (1885-1979)가 첫번째 레코드를 내놓았다 -- 훗날 Grateful Dead의 몇몇 노래는 Uncle Gus Cannon의 곡에 뿌리를 두고 있다.

Papa Charlie Jackson의 1924년 레코딩은 Wisconsin Chair Company의 자회사로 뉴욕에 근거하고 시카고에서도 레코딩 작업을 했던 Paramount 레이블에서 나왔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기에, Okeh 외에, 블루스를 취급한 메이저 레코드 회사로는 Victor, Vocalion, 그리고 ARC (American Record Company)가 있다. 이 시기의 레코딩은 약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았는데, 특히 시골 환경에서 그대로 레코딩하는 경우가 많았다 -- 먼저 연주자들이 모일 시간과 장소(보통은 해당 지역 호텔)를 미리 공지하고나서 레코드 회사의 대리인이 아틀란타 같은 도시에 찾아가거나 레코드 회사의 대리인이 town이나 작은 흑인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에 재능있는 뮤지션의 음악을 들어보고나서 시골 잡화점에 장비를 벌여 놓고 레코드 회사의 대리인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사람의 음악을 녹음을 했을 것이다. (주 : 이런 장면은 미국 대중 문화의 마이너 쟝르에서만 대충이나마 재현되었을 뿐이다 -- 1962년 Andy Griffith Show의 에피소드 "Mayberry on Record"는 한 레코드 회사의 스카우트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레코드 회사의 스카우트는 Mayberry에 나타나 오디션을 주관하고 그 지역에서 음악에 재능 있는 뮤지션의 음악을 녹음한다 --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연찮게 Kentucky Colonels 같은 bluegrass(미국 남부의 컨트리 음악) 그룹도 만나게 된다)

이 시대 최고의 블루스맨들은 수백곡에 이르는 레퍼토리를 갖고 있었고 언제나 청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곡도 몇 곡씩은 갖고 있었다. 유망한 곡 하나만이라도 있는 블루스맨이라면 레코딩해 볼 기회는 있었다 ; 많은 뮤지션들이 첫번째 두 곡을 녹음하는 한 번의 세션 또는 여덟 곡이나 열 곡을 녹음하는 세 번의 세션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Big Bill Broonzy와 Tampa Red 같은 사람들은 25년 동안 수백 곡을 작곡하고 레코딩해서 각각 시디 한 12장 정도는 거뜬히 채울 정도였다.

레코드 회사의 심사를 통과한 가능성있어 보이는 뮤지션들은 보통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맺었다. 레코딩은 아주 도박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 마이크는 조잡했고 소리를 제대로 잡아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으며 레코딩 테이프는 있지도 않았다. 당시 레코딩 과정은 포터블 녹음장비(무게가 몇 백 파운드 정도 나갔다) 위에서 뜨거운 왁스 상태의 락커를 잘라내는 것이었다. [뭔 말인지 모르겠음T_T] “플레이백(역주 : 갓 녹음한 레코드의 재생)”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플레이백은 락커를 손상시키기 때문이었다 -- 몇 개월 뒤 프레싱 작업이 들어가기 까진 오류를 체크할 방법이 없었고, 제한된 시간과 자금 밖에 없는 뮤지션과 프로듀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녹음이 됐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때때로 당시 아주 운좋고 야심있는 프로듀서들은 블루스의 전설적인 거목들을 함께 레코딩하여 역사적인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 20세기 전반 최정상급 기타 연주자들인 Papa Charlie Jackson과 Blind Arthur Blake는 "Papa Charlie and Blind Blake Talk About It - Parts I and II"라는 레코드를 내놓았고, Jackson은 Hattie McDaniel와 듀엣으로 "Dentist Chair Blues - Parts I and II"를 내놓았는데, 이는 Hattie McDaniel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오스카 상을 타기 수십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John Lee) Sonny Boy Williamson의 가장 초기 레코딩에는 블루스 만돌린 스타 Yank Rachel을 비롯해 Robert Lee McCollum (aka Robert Nighthawk)와 Big Joe Williams같은 뮤지션들이 함께 참여했다.

블루스 레코딩 과정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쉽게 잊어 버린다. 모든 레코딩은 78회전 디스크에 담겨 출시되었는데, 78회전 레코드는 한 면에 최대 3분 남짓한 정도의 런닝 타임을 갖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블루스 연주자에겐 레코드에 맞추기 위해 연주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의 78회전 레코드에 비추어 볼 때, 블루스 연주자들이 일반적으로 연주하던 6분 내지는 7분 정도 길이의 곡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 Leadbelly는 1948년 레코딩 테이프에 녹음된 첫번째 세션(그의 레코딩 경력의 가장 후기에 해당한다)을 벌이기 전까지는 자신의 곡을 레코드에 맞도록 줄이느라 항상 고심해야 했다. 드물게는 곡이 아주 매력적이어서 프로듀서가 한 곡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레코드의 양면에 수록하는 경우도 있었다 -- 블루스 최고 명반 중 하나인, 20년대 후반 Victor에서 나온 Furry Lewis의 대서사시 "Casey Jones”는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데, 역시 아주 드문 경우일 뿐이다.

당시 초기 레코딩이 이루어진 계약 조건은 현대적 기준으로 볼 때엔 “약식/비공식” 계약이었다. 레코딩에 참여한 사람들 일부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뮤지션들이 받은 급료는 50달러에서 100달러 정도와 4곡이나 6곡을 녹음하는 오후 레코딩 세션을 진행할 때 제공했던 진이나 버번이 전부였다. 로열티는, 로열티가 계약의 일부였다면 아주 드문 경우였겠지만, 거의 지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뮤지션이 자신의 창작곡에 저작권을 행사하는 것에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당시에는 레코드 판매에 대한 로열티를 거두어들일 방법이 거의 없었다.(여기에 주목해볼만한 예외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바로 Big Joe Williams였다. Big Joe Williams는 "Baby Please Don't Go”에 저작권을 설정할 정도로 선견지명이 있었고 1960년대 락과 블루스에 저작권 설정은 표준적인 일이 되고 나서 그는 "Baby Please Don't Go”에 설정한 저작권 덕에 수입이 꽤 좋았다)

레코드를 파는 일은 위와는 또 달랐다. 레코드 판매점이 존재했지만 초기 레코드 판매점은 78회전 레코드 뿐 아니라 낱장 악보와 심지어는 piano rolls까지 팔고 있었다. 레코드는 낱장 악보보다 덜 중요했고, 이런 판매점에서 가장 많이 쌓아 놓고 있었던 것은 클래식 음악, Tin Pan Alley 타입의 대중음악, 그리고 재즈였다. 블루스 레코드가 판매점에 있다면 변두리의 판매점일 뿐이었다 -- 뉴욕의 할렘이나 시카고의 South Side -- 변두리에선 블루스 레코드를 사려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것도 대도시에서만 그랬을 뿐이다.

다른 지역, 특히 미국 최남부에선 “레코드 판매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레코드는 잡화점, 가구점, 그리고 음악과 무관한 그밖의 판매점에서 팔았고 보통은 이런 곳이 축음기를 파는 곳이기도 했다. 음반은 고르게 배포 되지도 않았다. 같은 주의 어떤 군county에서는 살 수 있는 레코드가 다른 군county에선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20년대에 Blind Lemon Jefferson (1897-1929)의 몇 몇 레코드는 쉽게 50만장에서 백만장 정도로 팔렸다. 정말 놀라운 숫자였다.(그렇지만 Blind Lemon Jefferson은 별로 이득을 얻지 못했다 -- Blind Lemon Jefferson은 1929년에서 1930으로 넘어가는 겨울, 시카고 거리에서 얼어죽었다) 사실, Blind Lemon Jefferson의 노래 중 최소한 몇곡의 경우에는 아주 많이 팔려서 락커 마스터(역주 : 아마 카피를 만드는 원판으로 추정됨 -_-;;)가 다 닳아 없어질 정도였고, 이 때문에 Blind Lemon Jefferson은 이 노래들을 재녹음했다. 게다가 빈곤한 남부 농촌이나 북부 도시의 게토가 상대적으로 고립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0년대 블루스 청취자들은 아주 세련된 입맛을 갖고 있었고 이들이 전기 녹음과 같은 것을 떠들어대는 광고에 충분히 반응하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 덕에 Paramount는 1925년 전기 녹음이 등장하자 이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주 : 전기 녹음이란, acoustic recording horn과는 반대로, 소리를 증폭할 수 있는 전기 마이크를 통해 레코딩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Paramount 레코드는 레코드의 음악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량 이상으로 판을 팔아치우는 수상한 판매 수완이 있었다. Paramount에서 찍어낸 78회전 레코드는 잡음이 많고 최상의 환경에서도 쉽게 마모되곤 했는데, 이 회사의 레코드에는 스크래치가 있었고 아주 싸구려로 찍어내서 대여섯 번만 틀어도 마모되기 시작하곤 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청취자들은 Paramount에서 나온 앨범 중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다시 구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 상태 좋은 Paramount 레코드를 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Charlie Patton, Papa Charlie Jackson 그리고 Blind Lemon Jefferson와 같은 Paramount 소속 뮤지션의 음악 모두는 디지털로 옮길 때 알아 들을 수 있으려면 노이즈 제거를 엄청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Blind Lemon Jefferson, Papa Charlie Jackson, the Beale Street Sheiks (aka Frank Stokes and Dan Sane) 그리고 Charlie Patton (1887-1934) 같은 Paramount 소속 뮤지션들의 complete work를 재출시하려는 노력은 좌절해 왔다. 현재 최고의 디지털 클린업 작업으로도 작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Shellac 디스크는 깨지기 쉬웠고 1950년대까지는 블루스의 역사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 없었으니 이런 디스크들이 희귀하리라 것는 뻔한 노릇이다. 현재 78회전 레코드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 Paramount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회사 소속의 뮤지선들의 레코드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화낼 만한 노릇이다.

Blind Lemon Jefferson의 성공을 필두로 1920년대 후반 블루스 레코드 판매는 증가 일로에 있었고, 프로듀서들과 스카우트들은 Blind Lemon Jefferson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재능있는 뮤지션을 찾아 미국 남부를 헤맸다. 불행히도 대공황과 함께 이 모든 것은 멈추고 말았다.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격변은 미국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남부 농촌을 강타했다. 1930년대 초반 Paramount 레코드는 파산했다 ; 1930년대 끝자락에 American Record Company는 Columbia 레코드에 넘어갔다 ; 그리고 Okeh도 Columbia 레코드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1931년 이후 Mason-Dixon Line(역주: Maryland주와 Pennsylvania주의 경계선으로 남부와 북부의 경계선임)을 넘어 갔던 레코드사 스카우트는 거의 없었다.

스카우트들이 사라짐에 따라 지방의 새로운 재능 있는 뮤지션을 발굴할 수 있는 기회도 제약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블루스를 포함한 레코딩 활동 일반을 침체 상태로 만든 다른 일련의 사건과 함께 일어났다. Paramount 같은 레코드 회사들이 지불 불능 상태로 빠져들었다는 사실은, 이런 레코드 회사들이 살아 있을 때 유지했던 착취 관행과 맞물려서, 수많은 블루스 뮤지션들로 하여금 레코딩 자체를 신뢰하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193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활동하던 최고 연주자들 중 일부는 자신의 레코드가 아무리 성공을 거두더라도 금전적인 보답은 거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어떤 사람들은 가난해지는 것 외에 다른 가망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식했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다른 무엇을 하건 음악을 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레코딩하고 연주했다.
Evolution: The 1940s






Blind Willie McTell
Curley Weaver



Blind Willie McTell와 Curley Weaver 같은 일부 어쿠스틱 컨트리 블루스 뮤지션들은 30년대 후반까지 레코딩을 했지만 시대의 변화는 이런 종류의 블루스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미국 남부의 인구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대공황은 남부의 극빈층 흑인들이 겨우 먹고 살기 위해 매달려 있던 일자리를 모조리 없애 버렸다. 흑인들의 북부 이주는 이미 1910년대에 시작되었고, 1920년대에 시카고, 뉴욕에는 상당한 규모의 흑인 사회가 형성되어 시카고와 뉴욕은 많은 블루스 레코딩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대공황은 단지 북부 이주를 더 절박한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시카고, 뉴욕 그리고 다른 북부 도시에서 흑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블루스를 듣는 사람도 바뀌게 되었다. 빅 밴드 재즈와 유사한, 새롭고 보다 정교한 블루스가 어쿠스틱 컨트리 블루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 즈음 농촌의 어쿠스틱 블루스는, 청취자들의 경제적 상황의 변화와 맞물려, 쇠락하고 있었다.

레코드 회사들은 이런 부드럽고 도회적인 블루스가 어쿠스틱 블루스보다 그들의 레코드 목록과 레코딩 스케쥴에 짜 맞추기 더 쉽다는 것을 알아치리게 되었다 - 30년대 후반과 40년대 초반의 “블루스”는 스윙 오케스트라가 남긴 자취의 한 분파가 되었고 좀 더 거칠고, 시골스러운down-home 소리를 내며 가사가 재즈보다 더 저속한 경향을 띈다는 점을 제외하곤 재즈와 거의 비슷해졌다 : 사실 이들 중 일부는 일이십년 뒤에 등장한 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Tampa Red와 Big Bill Broonzy 같이 솔로 어쿠스틱 연주자로 출발한 뮤지션들이 어느날 갑자기 6인조 내지는 그보다 더 큰 밴드의 리더가 되어 “컨트리하지 않은” 음악을 연주하게 되었다. T-Bone Walker (1910-1975) --재즈 팬들은 블루스 팬들만큼이나 T-Bone Walker를 사랑했다-- 의 블루스 레코드에서 처음 등장한 일렉트릭 기타의 발전은, 1940년대 들어서, 이런 변화를 가속시켰다.

이런 사운드가 퍼져나가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프로듀서인 Lester Melrose일 것이다. Lester Melrose는 1930년대 초반 Vocalion 레이블에서 일하기 시작해서 몇몇 레이블을 옮겨 다녔다. 40년대 초기 Lester Melrose는 Victor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Victor에서 Lester Melrose는 Bluebird 레이블의 수많은 계약을 이루어냈다 -- 사람들은 Lester Melrose를 "Bluebird beat"의 책사라고 불렀다. Lester Melrose가 동시에 여섯 명의 연주자를 순환하도록 하는 체계를 고안해 냈기 때문이었다. Lester Melrose가 고안한 체계에 따라 여섯 명의 연주자는 각기 서로의 레코드에 참여해 연주했다. 이는 그가 레코딩한 작품들의 높은 완성도를 보장했지만 -- 이런 사운드에 대한 비판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Lester Melrose가 프로듀스한 많은 레코드들은 사운드가 똑같았다. 특히 Lester Melrose가 이 여섯 명의 연주자들에게 다른 연주자의 곡을 레코딩하게 할 때는 정말 똑같았다. 물론 오늘날 이를 알아차리려면 해당 레코드들을 비교해 가며 들어 봐야만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Lester Melrose의 작업 방식은 오늘날 기준으로 볼 때 범죄에 미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보통 "Big Boy" Crudup 같은 뮤지션과 자기가 직접 계약했고, 자신이 해당 레이블과 레코딩 계약을 유지하면서 뮤지션들에게 레코딩에 대해 정액으로 급료를 지급했다. 이런 작업 방식 덕에 Lester Melrose는 로열티를 자신이 직접 거둘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곡의 저작권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데, 여기에는 창작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이것이 바로 Tampa Red의 창작곡 "Love with a Feeling" 같은 곡이 Merline Johnson, Sonny Jones, Tommy McClellan 같은 Lester Melrose에게 속한 뮤지션의 레코드에 수록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Lester Melrose는 로얄티를 뮤지션에게 지급하는 대신 자신에게 속한 뮤지션들이 다른 뮤지션의 레코드에 참여하게 만들어서 뮤지션들이 계속 연주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돈을 벌게 만들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Lester Melrose는 일인 음악 “회사 마을company town”이 된 셈이다 -- 어떤 뮤지션이 자신의 레코드에 대한 계약 조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 뮤지션은 세션 작업에서 얻는 수입을 잃게 될 것이다.

Lester Melrose가 프로듀스한 레코딩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Lester Melrose는 Votor의 경쟁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작은 밴드 규모로 만들어낸 블루스는 블루스의 거친 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프로듀서와 레이블로서는 40년대 초기부턴 당시 남아 있던 스윙 밴드의 음악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40년대 중반 즈음에는 블루스엔 심할 정도의 구태의연함과 의욕 상실이 스며들었다. 시장의 포화 상태가 됨에 따라 판매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로 드러났듯이, 이런 블루스는 청취자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Victor와 Columbia (Columbia는 American Record Company와 Okeh label를 흡수했다) 같은 메이저 회사들은 블루스 노래나 블루스 세션의 숫자를 줄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Tampa Red는 30년대 중반이후 Victor에서 1년에 26곡 정도까지 레코딩하곤 했지만, 1940년대 후반에는 일년에 한두 번 스튜디오에 가서 몇 곡 레코딩하는 것이 전부였을 뿐이었다. 1940년대말에는 어느 레이블도 블루스를 취급하지 않았다. 1951년 이런 상황에서 새로이 RCA와 계약했던 Piano Red (aka Willie Perryman)가 RCA 사상 처음으로 팝 차트에 오른 첫번째 블루스 뮤지션이되고 당시에 내놓은 "Red's Boogie", "Rockin' with Red", "Right String but the Wrong Yo Yo", 그리고 "Layin' the Boogie" 같은 곡들로 한동안 RCA 레이블에서 가장 많은 레코드가 팔린 뮤지션 중 한 사람이 됐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여전히 메이져 레이블들은 R&B와 블루스에 대해서만큼은 혼란상태에 있었다. 오히려 블루스 음반을 사는 사람에게 더 가까이 있던 것은 독립 레이블이었고, 이런 현상은 1946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블루스가 시장에서 거의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에는 블루스 업계에 약간의 수요는 존재했다.

로열티가 뮤지션에게 지급될 때, 뮤지션에게 지급되는 로열티는 적당한 정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로열티라는 개념은 최근에 와서야 이해되었다. 비록 프로듀서들이 로열티를 최소한 작게 하려고 조치를 취해 놓긴 했지만 말이다. Lester Melrose를 통해 Victor의 Bluebird와 계약했던 Arthur Crudup은 자신의 계약 조건이 자신이 받을 음반 판매 수익을 빼앗아가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1940년대 그의 레코드가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그에게 떨어진 로얄티는 거의 없었다. 1960년대 Arthur Crudup이 재조명되고 자신의 음악과 연주에 걸맞는 정도의 수입을 얻기 시작한 뒤에도, Arthur Crudup는 절망에 빠져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지. 그리고 나는 가난하게 죽게 될거야.”

이제 누군가 이렇게 물을 것이다 :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왜 연주하고 음악을 만들었던 걸까?

한 가지 대답은 이런 것이다 : 그래도 음악이 중요했다 ; Crudup, Blind Willie McTell, Buddy Moss, 그리고 Skip James같은 사람들, 이들은 자신이 사기당하고 착취당해왔으며 어쩌면 보다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강탈당해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음악은 그들 마음 깊숙한 곳의 기쁨을 주었다.

그래도 그들은 계속 블루스를 연주했다. 아마도 자신들의 음악이 블루스였기 때문일 것이다 -- 그리고 Willie Dixon의 말이 옳다면, 블루스는 슬프게 들리지만, 당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행복”이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만족감이며, 이 뮤지션들이 무언가 할 이야기를 품고 이렇게 살아왔음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음악, 삶이 그들에게 어땠는지에 관해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음악, 바로 이런 음악을 가지고 무언가를 했다는 만족감을 의미할 것이다 ; 수입은 너무 적게 손에 들어왔고, 실제로 도움이 되기에는 너무나 늦게 들어왔다. 그러나 흑인이건 백인이건, 사람들은 그래도 블루스를 들었다. 더구나 이런 뮤지션 중 일부는 그저 음악이 좋아서 자신이 사기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블루스를 연주했다 -- Piano Red의 "Right String but the Wrong Yo Yo"는 최소한 세 차례나 히트했지만, Piano Red는 레코딩 뮤지션으로 거둔 성공에 대한 아무런 금전적 보상도 받지 못했다 ; 한편 작곡자로서 받은 돈에 대해서도 수십년간 신경쓰지 않았다.

작곡자들에게도 상황은 더 낫지 않았다. 그러나 1939년 Broadcast Music Incorporated (BMI)이 설립되자 미래에라도 작곡자들이 좀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는 수단이 마련되었다. Broadcast Music Incorporated (BMI)는 작곡자들의 로열티 수익을 감독하는 권리 행사 기구였다. 그때까진 이런 일을 하는 기구는 ASCAP(American Society of Composers, Authors, and Producers) 뿐이었다. 수십년간 ASCAP은 소속 작곡자들이 곡의 판매와 방송에 대해 수익을 올리도록 해 왔다. 그러나 ASCAP는 상류층 클럽처럼 운영되는 조직이었고, Broadway, Tin Pan Alley, 클래식, 좀 세련된 재즈 등 보다 “존경할만한” 영역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대해서만 가입을 허용했다. 블루스 곡을 작곡하는 사람은 가입이 거의 불가능했다.

BMI는 컨트리&웨스턴, hillbilly, 재즈, 블루스 작곡가를 포함해 ASCAP에 가입하지 못했지만 훌륭한 곡들을 창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두 기구 사이의 경쟁은 아주 치열해서 초기엔 두 기구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1940년대 초기엔 ASCAP의 곡 전체가 방송에서 사라질 정도였다. 뒤에는 다소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져 BMI는 확고히 자리잡고 인정을 받게 된 후에도 ASCAP는 가입을 제한하는 상태로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고, 그리고 ASCAP는 꽤 오랜 기간 두 기구 중 상위 기구로 간주되었다. (주 : 이는 다음과 같은 편견 때문이었다 : 회원수나 수익에서 ASCAP에 뒤쳐져 있던 BMI가 50년대 중반과 후반 컨트리&웨스턴과 블루스의 소산인 락앤롤이 방송과 레코드 판매를 지배하게 되자 오래된 라이벌에게 갑자기 도전해 왔다 ; 대부분의 락앤롤 작곡자들은 BMI의 회원이었다. 이는 락앤롤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BMI를 공격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ASCAP가 관리하는 좋은 음악보다 “질이 낮은” 락앤롤 음악을 대중에게 퍼뜨린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침내 BMI의 설립과 더불어 블루스 작곡가를 위한 기구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BMI가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탐욕스러운 프로듀서들은 소속 뮤지션들이 발행권을 양도하도록 했고, 발행자들도 작곡자를 속이려고 레코드회사와 짜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작곡으로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메커니즘은 존재하게 되었다.

어떤 뮤지션들은 작곡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장래에라도 잘 살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였다. 이렇게 한 가장 최초의 사람 중 하나가 Hudie Ledbetter라고 불리기도 한 Leadbelly였다. Leadbelly는 포크송 수집가였던 John Lomax와 그의 아들 Alan이 루이지애나 교도소 농장에서 “발굴”해낸 뮤지션이다. 그는 Lomax 부자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나 상업적인 레코딩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마도 John Lomax와의 만남 덕에 Leadbelly는 작곡의 사업적 이익에 대해 이해하고 이익을 얻게 된 첫번째 블루스맨 중 한 사람이 되었다. Lomax는 Leadbelly에게 사업에 관한 모든 부분을 보여줄 때 호의로 가득 차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뮤지션 발굴에 대한 경력과 지위를 보장받으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Lomax는 수많은 Leadbelly의 곡을 자신과 Leadbelly 양쪽으로 저작권을 설정했고 이렇게 해서 자신이 로열티 일부를 차지하도록 해 놓았다. 결국 싱어/기타리스트였던 Leadbelly는 같은 시대의 다른 어느 블루스 작곡가들보다 작곡의 사업적 측면을 잘 이해하고 있는 채 뉴욕에 도착했다. 비록 Leadbelly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로 인해 혜택을 입을 정도로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그의 미망인은 팔자를 고칠 정도의 인세 수익을 얻게 되었다.

Big Bill Broonzy 역시 저작권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연주자/작곡자였지만, 자신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보호할 실제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청취자 뿐 아니라 동료 뮤지션에게 블루스 작곡자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세대 다른 뮤지션들의 권리가 보장되도록 확립한 사람은 바로 Willie Dixon이었다.

십대 시절부터 작곡을 계속 해 온 -- 십대시절에도 Willie Dixon은 자신의 곡을 여러 지역 밴드에게 팔곤 했다- 타고난 작곡가 Willie Dixon은 40년대 초기에 곡의 저작권의 중요성에 대해 알아채고 있었다. 비록, Willie Dixon과 Chess레코드와의 관계의 일부로서, Chess 레코드의 출판 자회사였던 Arc Music과 계약하는 것으로 끝내기는 했지만, Willie Dixon은 자신이 작곡한 곡들에 대해 눈을 뗀 적이 없었다. 1970년대 전투적인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1940년대 작곡한 수많은 곡에 대한 28년 계약 갱신이 다가오자 Willie Dixon은 자신의 곡에 대한 소유권을 선언하고 자신의 수많은 히트곡에 대한 경제적 이익을 요구했다. Willie Dixon은 블루스 분야에서 작곡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첫번째-혹은 아마 보다 정확하게는 가장 나이든-작곡자가 되었다.
Postwar Blues: The Modern Era

메이저 레이블들은 블루스에서 손을 뗐지만, 어떤 사운드가 통할지 잡아낼 수만 있다면 여전히 블루스 시장은 남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 중 가장 주목해 볼만한 사람들은 시키고의 Phil Chess와 Leonard Chess, 멤피스의 Sam Phillips, L.A.의 Saul Bihari, Jules Bihari, Joe Bihari이다. 이 세 레이블은 재능 있는 뮤지션을 찾고 있었고, Chester "Howlin' Wolf" Burnett의 작품을 놓고 최소한 한 차례 삼자간의 줄다리기를 벌인 적이 있다.






Chuck Berry
Bo Diddley



Chess Records는 가장 널리 알려진 레이블인데, 그들이 유명해진 것은 부분적으론 Chess에 소속된 블루스 스타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고, 훗날 Chuck Berry와 Bo Diddley의 음악을 가지고 Rock & Roll에 성공적으로 진입했으며, Ramsey Lewis의 작품을 통해 Jazz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Chess는 2차 대전 이후에 생겨난 회사인데, 처음에는 Aristocrat라는 이름이었고 이 레이블에서 나온 레코드들은 40년대 중반 빅밴드 블루스 스타일의 음악이 많아서 메이저 레이블에서 나온 음악들과 별 차이가 없었고, 설립자인 Phil Chess와 Leonard Chess가 소유한 클럽의 출연진도 별 차이가 없었다.

1930년대 이래 시카고에서 블루스는 상당히 여러 인물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1920년대가 끝날 즈음부터 1930년대가 끝날 때까지, Tampa Red는 밴드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이자, 작곡자로서 시카고 블루스 무대의 거물이었다. 어떤 설명을 들어봐도, Tampa Red의 아파트는 낮이던 밤이던 모든 종류의 뮤지션들의 메카이자 만남의 장소이자 소굴이었고, Tampa Red의 아내는 언제나 즐겁게 그들을 대해주었다고 한다. 훗날, 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끝무렵까지 시카고 블루스의 거물은 Big Bill Broonzy였다.






Tampa Red
Big Bill Broonzy



Tampa Red와 Big Bill Broonzy는 전성기 시절 거의 대부분 Victor의 Bluebird 레이블에서 레코딩했다 -- Tampa Red는 Chess 레코딩 일부에 세션으로 참가했고, 50년대 초반 자신의 사촌 Washboard Sam과 함께 Chess에서 몇 곡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후계자였던 거물급 밴드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이자, 작곡자였던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Chess Records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 그 사람이 바로 Muddy Waters이다.

델타에서 이주해 온 McKinley Morganfield (aka Muddy Waters)는 1947년부터 Chess에서 레코딩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에 Columbia에서 싱글을 레코딩했고, 그 이전에는 John Lomax와 Alan Lomax의 야외 레코딩에 참여한 적이 있다.(아마도 이런 식으로 소개되어 델타 블루스와 상업적 블루스 세계 양쪽을 가로지르고 상업적 블루스 세계의 정상에 오른 사람은 Muddy Waters 뿐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Sunnyland Slim의 도움을 받아 Sunnyland Slim의 레코딩에 세션으로 참여하면서 Chess로 오게 된다. Chess로 온지 얼마되지 않아 Muddy Waters는 자신의 레코드를 내놓았다. Muddy Waters의 강력한 목청에서 Guttural 나오는 보컬과 일렉트릭 기타의 결합은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Robert Johnson이 2차대전 이전에 연주해 온 어쿠스틱 컨트리 블루스에서 파생된 것이다. 다만 Muddy Waters 쪽 사운드가 보다 크고 보다 강력하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게다가, 그의 음악은 잘 팔렸다. Chess Records는 생생한, 그리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일렉트릭 블루스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위한 시장을 어느날 갑자기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런 블루스는 이전 10여년간 시카고를 지배했던 상업적인, 댄스 밴드 타입의 블루스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곧 Chess Records는 Little Walter Jacobs, Howlin' Wolf, 그리고 Sonny Boy Williamson II 같은 새로운 세대의 블루스 스타들의 음악을 레코딩했고, 뒤에는 Jimmy Rodgers, Buddy Guy, 그리고 Koko Taylor 같은 타고난 재능의 연주자 겸 싱어들의 음악을 레코딩했다. Chess의 역사 초기에 Chess는 Robert Nighthawk 같은 오래된 블루스 스타가 레코딩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이 때 나온 "Sweet Black Angel"에 Willie Dixon이 베이스로 음반에 데뷰하게 되었다.

Biari Brothers는 자신들 소유의 여러 레이블인 Modern, RPM, 그리고 Crown에서 Chess에 비견할만한 일관된 활동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도 B.B. King, Elmore James, 그리고 (briefly) Howlin' Wolf 같은 스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레이블들의 활동은 Chess 소속 뮤지션만큼의 통일성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레코드를 파는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더 야심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 B.B.King이 1960년 Crown을 떠난 뒤, Bihari Brothers는 B.B.King의 가장 인기있는 곡들을 모아 훌륭한 앨범 둘을 내놓았고 B.B.King의 싱글 일부를 더빙하면서 관악기 연주를 추가해 스테레오 효과를 만들어 내도록 리마스터링했다.

Sam Phillips의 Sun Records는 Elvis Presley를 발굴한 것으로 유명하며(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따르자면, Elvis Presley는 Sun Records에서 그의 최고의 음악을 내놓았다) Johnny Cash, Jerry Lee Lewis, Carl Perkins, 그리고 Roy Orbison 등이 초기에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Sam Phillips는 중요한 블루스 음반 역시 세상에 내놓았다. Sam Phillips는 Memphis 최초의 근대적인 스튜디오인 Memphis Recording Services를 설립했고 여기에서 멤피스 지역의 Blues뮤지션들과 R&B 뮤지션들의 곡을 내놓았다. Sam Phillips는 다른 지역에 있는 레이블에게도 Memphis Recording Services 이용 허가를 내주곤 했다 - 주 이용자는 시카고의 Chess, L.A.에 있던 Bihari Brothers 소유의 Modern이나 RPM 등이었다. 오늘날까지도 Sam Phillips는 Chester "Howlin' Wolf" Burnett을 자신이 발굴한 최고 뮤지션이라고 생각하고, 만일 Chester "Howlin' Wolf" Burnett가 그와 함께 있었더라면 Little Richard 같은 거물급 Rock & Roll 스타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Howlin' Wolf는 Sam Phillips와 함께 첫번째 음반을 내놓았고, 멤피스의 그 프로듀서(Sam Phillips)가 자신이 발굴한 새로운 스타인 Howlin' Wolf를 잃은 뒤 처음엔 Bihari 형제들에게 갔다가, 뮤지션 트레이드와 계약 분쟁이라는 아주 복잡한 과정의 일부로 이번엔 Chess로 옮겨갔다. Howlin' Wolf의 진정한 첫번째 레코드 "Moanin' at Midnight"는 블루스에서건 블루스 아닌 음악에서건 이전에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사운드[ crossing feedback and a basso moan from the six-foot-four Wolf ]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그 뒤 23년간 계속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Phillips가 레코딩한 다른 주요 뮤지션으론 싱어인 Jackie Brenston과 기타리스트 Ike Turner 등이 있고 -- Ike Turner는 같은 밴드의 일원으로서 “Rocket 88”을 레코딩했는데, 이 앨범은 최초의 "rock & roll" 레코드로 언급되곤 한다 -- 그리고 Sun 레이블로 설립된 1950년대 끝무렵엔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인 Frank Frost 등이 있었다.

전후 블루스 역사에 많은 공헌을 한 다른 레이블로는 L.A. 기반의 Imperial Records가 있다. Imperial Records는 텍사스 블루스맨 T-Bone Walker와 Li'l Son Jackson 등의 음악을 레코딩했다 -- T-Bone Walker가 Imperial Records의 레코드에서 보여준 연주는 Chuck Berry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Chuck Berry는 Chess의 스타가 된다 ; 미시시피 기반의 Trumpet Records는 Sonny Boy Williamson II와 (briefly) Elmore James가 자신의 음악 경력을 시작한 곳이다 ; 그리고 시카고의 Cobra Records는 1956년부터 1958년 몰락할때까지 Chess Records와 경쟁하려고 노력했다. Cobra Records는 Otis Rush -- Otis Rush는 그의 사운드가 Muddy Waters와 너무 비슷하다는 이유로 Chess로부터 거부당했다 -- 를 보유했을 뿐 아니라 Cobra Records는 Buddy Guy가 시카고에 왔을 때 Buddy Guy와 첫번째로 계약한 레이블이기도 했으며, 또한 기타리스트 Magic Sam과 Ike Turner의 Kings of Rhythm을 보유하기도 했다 : Cobra Records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시기는 1956년이었는데 이 시기는 Cobra Records가 Chess의 베테랑 프로듀서이자, 편곡자이자, 작곡자이자 베이스 주자였던 Willie Dixon의 도움을 얻었을 때였다.






Tampa Red
Sonny Boy Williamson Ⅱ



Imperial이 블루스 쪽에 관여 시기는 1950년대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작은 레이블 역시 오래 버티지 못했다. Trumpet는 1950년대 초반 파산했는데, 이 사건은 Sonny Boy (Rice Miller) Williamson이 그곳에서의 계약이 끝났을 때 Chess에겐 행운으로 드러났다. Cobra는 1958년 문을 닫았는데, 활동한지 겨우 2년 만의 일이었다. Trumpet과 Cobra에서 나온 음반들은 제대로 혹은 널리 배포되지 않았다 -- Cobra에서 나온 음반들은 이 회사가 문닫은지 33년 뒤인 1993년 Capricorn Records에서 Cobra에 헌정한 박스 셋을 출시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국적인 음반 배포를 실시한 적이 없다. Bihari 형제나 Sun 역시 1960년대 초반을 넘어선 뒤로는 거의 활동을 못했다. 그러나 이 회사들은 Chess와 함께 모던 블루스 레코딩이 세워진 토대가 되었다.

이 레이블들은 40년대 후반 그리고 50년대 초반과 중반기에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들 생각으론 거의 모든 흑인 청취자들에게 블루스 싱글들을 팔았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청취자들 중, 특히 50년대 초, 중반이래의 청취자들 가운데엔 소수의 젊은 백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소수의 젊은 백인 청취자들은 흑인 라디오 방송을 들었고 때때로 흑인 음악 레코드를 샀으며 심지어는 콘서트에 가기도 했다. “우린 백인들을 위해 연주하지 않습니다” B.B.King은 1957년 이렇게 말하고는 덧붙이기를, “물론, 하루짜리 공연에 들으러 온 백인들이 좀 있기는 했습니다.”

거의 대부분 레이블과 뮤지션들은 백인 청취자가 적지만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이 없었다. 결국 어느 누구도 이미 상당한 수로 존재하는 흑인 블루스 청취자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어떤 방법으로 백인 청취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지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블루스 레이블들은 모두 소규모였고 독립 레이블이었다 -- 개중 가장 성공을 거둔 레이블인 Chess 조차도 1960년대 말까지는 가족들이 운영하는 회사로 남아 있었다 -- 이들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다. 1948년 LP 레코드가 도입되었을 때, 거의 모든 쟝르의 프로듀서들은 즉각 LP 레코드와 관련된 작업을 벌여나갔다. 클래식 음악은 분명 가장 큰 수혜자였다. 클래식 청취자라면 교향곡을 6장 내지는 그 이상의 shellac 78회전 레코드 모음에 담아 둘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재즈 레이블도 이에 따라왔다. 연주자들과 프로듀서들은 쉬지 않고 15분에서 20분 정도에 달하는 레코딩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팝 음악도 동참했다. 팝 음악은 각 노래를 위한 기본 포맷으로는 45회전 디스크를 사용하고 곡들을 모아 놓은 것을 위한 매체로 LP를 활용했다.

그러나 블루스는 달랐다. 블루스 청취자들은 팝이나 클래식 청취자들보다 훨씬 가난했다 -- 78회전 플레이어는 1950년대 후반까지는 여전히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LP 레코드에 대한 뚜렷한 수요도 없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클래식 음악이나 재즈와 같은 의미에서의 블루스의 역사라는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 블루스는 그냥 돈 벌기 위해 나온 것이었고 블루스의 과거는 클래식과 재즈의 과거가 각 청취자나 이를 취급하는 회사에게 중요했던 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2차대전 이전에 레코딩된 수많은 블루스, 특히 1930년대부터 나온 컨트리 블루스는 무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컨트리 블루스의 거장들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며 그들 상당수는 1930년대 중반 Paramount같은 레이블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 : 심지어는 ARC나 Vocalion처럼 메이저 회사에 흡수된 레이블의 창고에 남아 있던 거장들의 레코드도 사라진 것이 부지기수이다. 블루스 분야에서 활동한 회사들은 모두 2차대전 이후에 설립된 회사들로 2차대전 이전의 블루스에 접근할 길이 없었다.

1954-1956년 Rock & Roll의 탄생은 블루스에 맞추어져 있던 잠재적 백인 청취자들의 관심 상당 부분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같은 이유에서 R&B는 젊은 흑인 청취자들을 Muddy Waters와 Howlin' Wolf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했다. 이로써 1950년대 말에 블루스 음악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일은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희망이 생겨났다. 좀 나이 먹은 -- 대부분 대학생 또래의 청취자들로 이들은 십대의 불안을 담은 노래에 대한 인내심이 부족했거나 이런 노래가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 백인 청취자 그룹은 점차 블루스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Chess나 Bihari 형제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비록 본인 말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Sun Records의 Sam Phillips는 이런 사람들은 50년대 초기부터 계속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들이 얼마나 되고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블루스에 관심을 잃은 흑인 청취자를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변화는 1950년대 말에 다가왔고 무대 위에서 일어났다. Muddy Waters와 Howlin' Wolf의 레코드는 잘 팔리고 있었고 B.B.King 역시 수많은 청취자를 거느리고 있어서 그가 Bihari 형제와 맺은 계약이 만료되자마자 상당히 많은 레이블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1958년 Muddy Waters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공연을 하게 됐는데, 영국 청중들에게 받은 반응은 그를 정말이지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저 바다 건너로부터 레코드로만 그의 음악을 들어왔던 수만명의 사람들이 무대에서 그를 환호했고 그의 노래와 연주 마디마디에 완전히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1년 뒤 Muddy Waters는 Newport Folk Festival에 모습을 드러냈다 - 이번엔 수천명의 미국인 청중들 앞이었다. Muddy Waters가 자기 이름을 걸고 공연했던 중 가장 많은 단일 청중이 모인 것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백인이었고 이들은 그의 밴드에 미친듯이 열광했다. 이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은 30년 동안 Chess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그제서야 블루스 청취자가 사람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 청취자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백인 청취자들은 Muddy Waters와 Howlin' Wolf 같은 모던 시카고 블루스맨들의 음악을 좋아했고 B.B.King의 콘서트에 떼지어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Skip James, Mississippi John Hurt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Furry Lewis 같은 진짜 오래된 블루스맨들의 음악을 듣고 싶어하기도 했다. Furry Lewis는 앨범 레코딩에서 손뗀지 3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등장했는데 그는 꽤 성공을 거두었고 뒤엔 영화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고무적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혼란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흑인 청중들이 변하고 있었다 -- 나이든 팬들은 여전히 Muddy Waters와 Howlin' Wolf를 들었지만 젊은 흑인들은 보다 세련된 모던 어번 사운드와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사운드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젊은 흑인들에겐 Muddy Waters, Howlin' Wolf, Furry Lewis 그리고 1960년대 재발굴된 어쿠스틱 블루스 연주자들은 지난 시대의 유물이며 기대할 것이 없는 역사일 뿐이었다. 시민권 운동과 흑인 인권 운동이 일어나자 블루스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자신의 레코드의 사운드를 보다 세련되고 소울풀하게 만들기 위해 -- 그리고 보다 덜 컨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이미 Muddy Waters는 1955년 이후엔 스튜디오 레코딩에선 기타 연주를 하지 않았다. 이는 아주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왜냐하면 2차대전 이후 시카고의 최고 기타리스트의 반열에 있던 Muddy Waters가 자신의 첫번째 오리지날 스튜디오 앨범 <MUDDY Broonzy Bill Big Sings Waters>을 레코딩하면서 자신의 악기에 손대지 않고, 1963년에서야 스튜디오 앨범인 <FOLKSINGER>앨범에서 자신의 악기를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Chess와 Cobra는 항상 좋은 곡을 원했고 Willie Dixon은 대중의 귀를 끌어당기는 영리한 곡을 쓸 수 있는 솜씨를 갖고 있었고 그의 솜씨는 이미 검증된 것이었다. 이는 광범위하게 입증되었는데, 1960년대 그의 곡은 Peter, Paul & Mary에서 Cream에 이르는 백인 뮤지션들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Willie Dixon의 작곡 능력은 Muddy Waters와 Howlin’ Wolf 그리고 그의 곡을 레코딩할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었다.

때로 연주자들은 이런 상황과 자신들에게 주어진 요구에 혼란스러워했다. Muddy Waters는 1940년대 중반 시카고에 온 이래로 일렉트릭 블루스를 연주해 왔고, 그때 이래로 자신의 연주를 듣는 흑인 청중들은 더 이상 어쿠스틱 컨트리 블루스를 원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어쿠스틱 컨트리 블루스가 진부한 시대에 뒤쳐진 사운드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Muddy Waters가 1958년 첫번째 영국 투어에 나섰을 때 -- 이 때 Muddy Waters는 자신이 출연했던 어떤 개별 쇼보다도 더 많은 돈을 받았다 -- 영국 청중들이 시카고 스타일의 일렉트릭 블루스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일렉트릭 기타를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4년 뒤 Muddy Waters가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다시 영국에 갔을 때, 그 때 영국에서 연주하는 블루스는 모두 일렉트릭 블루스였다. 그리고 1963년 Muddy Waters가 새 앨범을 내게 되었을 때, Chess Records는 당시 유행하던 포크 음악 리바이벌 붐을 이용하려고 Muddy Waters에게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게 해서 <FOLKSINGER>앨범을 레코딩한다. 이 앨범은, 이전에 1941년 John Lomax와 Alan Lomax가 델타에서 그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야외 녹음했던 이후 Muddy Waters가 처음 내놓은 어쿠스틱 곡들이다. 이후 발표한 싱글에서 Muddy Waters는 일렉트릭 기타로 돌아갔고 이때 Sammy Lawhorn와 PeeWee Madison 두 명의 기타리스트와 함께 연주했고, 완전히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인 <MUDDY, Blues the and Brass,>앨범을 내놓았다.

Muddy Waters의 Chess 동료인 Howlin' Wolf는 이와는 반대로 청중들의 이런 모순적인 요구에 무관심한듯이 보였다. 독특한 보이스를 가졌고 하모니카(그는 하모니카를 Rice Miller aka Sonny Boy Williamson II에게 배웠다)와 기타에 출중한 재능을 소유했던 이 거구의 사나이는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은퇴할 때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연주했다. 사실 "Smokestack Lightning"과 "Sitting on Top of the World" 같은 그의 곡들이 백인 락 밴드의 주요 레파토리가 된 후에도 자신의 레파토리에 특별히 집어 넣거나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가 백인 대학생 청중들 앞에서 연주할 때도 그럴 정도였다. 이 때문에, 몇몇 블루스 가이드에 나온 것과는 달리, Howlin’ Wolf 의 1971년 콘서트 앨범 <LIVE and Revisited Alice's (At Cookin')>는 후반기에 당시에 흐름을 따르려는 시도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애 마지막 시기 동안의 콘서트 연주를 솔직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 앨범은 특히 CD에 수록된 보너스 트랙 덕에 더욱 강력한 앨범이다). 그러나 Chess Records가 Howlin’ Wolf에게 <THE New Wolf Howlin'>을 사이키델릭 스타일로 다시 레코딩하자고 하면서 Wolf의 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을 덮어 씌우고 그에게 타협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이는 시작부터 재난이 되고 말았다. Howlin’ Wolf는 공공연히 Chess Records를 “Dogshit”라고 떠들고 다녔다.

1960부터 1963년 사이에 Muddy Waters는 베스트 앨범을 포함해 세 장의 앨범을 내놓았는데, Chess Records와 맺은 초기 13년 동안의 계약 시기에 내놓은 것보다 3장이 많은 것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반 사이에 B.B.King를 듣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서 백인 청취자들도 B.B.King을 듣게 되었다. Bihari 형제의 Crown 레이블(소문에 따르면 이 레이블은 자사 LP를 한 장당 겨우 1.99$에 팔았다)은 1960년대 그의 싱글을 모은 두 가지 컬렉션을 출시했고, ABC-Paramount는 1963년 B.B.King의 LP를 내놓았다. 그러나 B.B.King이 진정으로 크로스오버로 성공한 첫번째 앨범은 1965년 내놓은 <LIVE the Regal at>이었다. 이는 분명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LIVE Regal at The>은 열광하는 흑인 청중 앞에서 벌이는 블루스 쇼를 포착한 마지막 시도 중 하나였지만, 이 앨범은 B.B.King을 막 알게 된 백인 청중을 끌어당기는 자석 노릇을 했기 때문이었다. (B.B.King이 알려진 것은 그가 일련의 크로스오버 활동 덕이었고, 특히 그의 크로스오버 히트곡 “The Thrill is Gone” 덕택이었다. 그의 크로스오버 활동은 주로 라스 베가스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이름이 붙은 무대에서 연주한 것이었는데, 프랭크 시나트라는 B.B.King의 연주에 자신이 직접 승인을 해주어야 했다…. 뭔 말인지 T_T) 1960년대 B.B.King은 Muddy Waters보다도 더 여러 차례 블루스 최고 연주자의 자리에 올랐고, 블루스를 락 음악의 주요 원천으로 간주하고 환호하며 증가했던 백인 청취자들을 끌어 들인 주요 인물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블루스는 꽤 큰 사업이었고 앨범 세션은 대부분 연주자들에게 꽤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심지어 2차대전 이전에 주로 활동했다가 재발견된 스타들 역시도 그랬는데, Bukka White, Mississippi John Hurt, Skip James 그리고 Arthur Crudup이 이런 경우였다. 이 중 Arthur Crudup은 이미 수십년 전에 음악을 그만 둔 바 있다. The Rolling Stones는 시카고의 Chess Records를 방문해서 1964년 세션 중 자신들의 베스트 곡 일부를 내놓았다. ("It's All Over Now," "Mona," "I Just Can't Be Satisfied," 그리고 "Confessin' the Blues" 등 이 때 나온 곡은 초기 런던 앨범, 컴필레이션 앨범, 그리고 관련 부트렉 등에 흩어져 있다)

이 모든 일은 블루스 청취자의 성격이 변했다는 사실과 일치했다 -- 점차 백인들이 블루스의 버팀목이 되어갔고, 반면 젊은 흑인들은 블루스를 무시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에 걸맞게 Muddy Waters나 Howlin' Wolf가 1960년대 중반 이후 R&B 차트에서 히트하기 보다는 대학생들에게 앨범을 팔아 Top 100 앨범 차트에 오르는 것이 더 쉬운 일이 되었다.

대부분 레코드 레이블들은 이런 변화를 받아들였지만 이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난감해했다. 레이블들은 모든 것을 다 시도해 보았다 -- B.B.King은 사이키델릭하게 덧칠한 앨범을 내놓았고 Muddy Waters는 <MUDDY, Blues the and Brass,>에서 B.B.King 같은 사운드를 내야만 했다. Muddy Waters와 Howlin’ Wolf는 Chess의 자회사인 Cadet/Concept 레이블(Leonard Chess의 아들인 Marshall Chess가 운영했다)에서 완전히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로 치장되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Leonard Chess 역시 당시 백인 청취자들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늦었다. Leonard Chess는 Buddy Guy 같은 걸출한 인물의 재능을 무시했다. Buddy Guy는 화려한 스타일로 리드 기타를 쳤는데 이런 스타일은 Muddy Waters와 완전히 다르며 오히려 Jimi Hendrix, Mike Bloomfield 그리고 대학생들이 열광했던 다른 기타 연주자와 똑같은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eonard Chess는 Buddy Guy가 다른 레이블과 계약할 때까지 그를 무시했다. 반대로 1950년대 Rock & Roll 음악을 많이 내놓지는 않았고, 블루스는 훨씬 적게 취급했던 Columbia Records와 Capitol Records는 정통적이며 확립된 스타일을 갖고 있는 Son House, Bukka White, Willie Dixon, 그리고 Mississippi Fred McDowell 같은 블루스 뮤지션들의 음악을 레코딩하기 시작했다. Son House의 경우, 그가 연주한지 하도 오래 되어서 미래의 Canned Heat의 공동 설립자이자 블루스 연구자였던 Alan Wilson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스타일에 다시 익숙해져야만 할 정도였다.

이 뮤지션들은 이런 상황 덕에 비록 서로 다른 액수이지만 돈을 벌게 되었다. Muddy Waters, Howlin’ Wolf, B.B.King, Lightnin’ Hopkins, Albert King 그리고 다른 블루스 스타들이 유럽에게 공연하기 시작했을 때 뿐 아니라(당시 공연료는 $2000가 보통이었는데 많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 클럽에서 공연할 때 받았던 돈의 열 배는 족히 됐다) 미국 대학 순회 공연을 시작하자 이들의 공연 수익은 상당히 올라갔다. 20세기 전반의 상황에서 살아 남은 연주자들 일부에게 블루스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증가하고 갑자기 돈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는 상황이란 감당하기 힘들었다 -- Mississippi John Hurt같은 연주자의 경우, 1920년대에는 음악으로 성공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해 보다가 1960년대 수천명의 열광적인 팬 앞에서 연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한번의 쇼로 받은 $1500의 공연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대부분 연주자들을 이런 상황을 잘 대처하고 지난 날의 성공에 대한 뒤늦은 대가로 여겼고, Mississippi John Hurt와 Furry Lewis처럼 40년이나 늦게 명성을 얻은 몇몇 사람들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중요한 레코딩을 남기기도 했다.

현재로선 이들의 로열티가 지급되었을 거리고 추정된다. 미심쩍기는 하지만 말이다 -- 한가지 예로, Piano Red는 이렇게 회상한다 : 1962년 Okeh 측이 그의 히트곡 "Mr. Moonlight"가 30만 카피나 팔렸음에도 이에 대한 로열티를 전혀 지급하지 않자 Okeh에서의 그의 레코딩 활동은 정지 상태가 되어 버렸다. 몇 몇 뮤지션들, Willie Dixon과 Chuck Berry같은 저명한 뮤지션들은 변호사와 회계사를 내세워 자신들이 자신들이 받아야할만큼 돈을 받고 있는지 검증하기 시작했다. 특히 작곡의 경우엔 훨씬 더 액수가 컸다. 특히 Rolling Stones과 Cream 같은 백인 슈퍼스타들이 이 사람들의 레퍼토리를 연주하기 시작했을 땐 말이다 -- 이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결국 Muddy Waters와 Willie Dixon은 자신들이 만든 곡의 저작권에 기반한 재정적 보장을 얻게 되었고, 곡 저작권으로 얻은 수익은 자신들의 레코딩만큼이나 많은 수익을 이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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