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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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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örn Christian Ulvaeus 비요른 크리스티안 울바에스

B 조회 수 7679 추천 수 0 2005.09.21 15:02:12


비요른 크리스티안 울바에스(Bjorn Kristian Ulvaeus)는 1945년 4월25일 스웨덴의 고텐부르크(Gothenburg)에서 태어났다. 그가 6살때 그의 가족들은 작은 마을인 페스테어빅(Vastervik)으로 이사를 했고, 거기서 그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울바에스 일가에게 음악은 그다지 중요한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열다섯살 중반즈음에 그는 락큰롤과 스키플(50년대 영국에서 발생한 락큰롤의 원조격 음악) 에 푹 빠지게 되었고, 그의 나이 12살때 처음으로 그의 기타를 가지게 되었다. 몇년후 그는 그의 사촌인 욘의 스키플 밴드에 합류하게 된다. 몇년후인 1960년대 초반 그 그룹은 전통재즈 그룹으로 변신하게 되는데 비요른은 여기서 밴조를 연주하게 된다.

이그룹의 베이스 주자인 토니 루스가 한시 슈바르츠가 리더인 경쟁관계 그룹인 Mackie's Skiffle Group에서 새로운 베이스 주자로 제의를 받게 되는데 이때, 토니는 비요른도 같이 참여하게 해달라는 조건부로 응낙을 하게 되었고, 다소 마지못하는 감이 없진 않았지만, 한시는 토니의 제안 을 받아 들인다.
1962년 그룹의 구성멤버는 비요른,한시,토니 그리고 요한 칼베르크 였는데 그들은 스키플과 재즈를 벗어나서 포크계열의 음악으로 목표를 재설정하게 된다. 몇번의 그룹명 변경끝에 그들은 스스로 the West Bay Singers로 확정하게 되는데, 1963년 9월 스웨덴 라디오 방송이 주최한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polar music 프로듀서인 Bengt Bernhag가 우연하게 신문에서 장기자랑대회 출전 그룹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었고, 그의 동료인 스틱 안데르손(stig anderson)이 그들과 만남을 가지게 되고, 곧바로 Bengt와 Stig이 지어준 이름인 the Hootenanny Singers란 이름으로 폴라뮤직과 정식 계약을 하게 된다.


그 해말 그들은 그들의 첫번째 싱글을 발표하는데 첫번째 곡은 그들의 대회 출전곡인 Jag vantar vid min mila ("I'm Waiting At The Charcoal Kiln") "나 숯가마에서 기다려용" 이라는 웃기는 제목의 노래였다. 제목이 웃기든지 말든지 노래는 빅히트를 쳤고, 마침내는 앨범과 싱글 종합차트에서 7위를 차지하게 된다.

1964년 봄에 이르러 그룹맴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Gabrielle같은 더 큰 히트곡들을 계속 내게 되는데, Hootenanny Singers는 그해말에는 스웨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아티스트들 중에 하나가 된다. 150회 이상의 공연을 포함하여 여러번의 Folkparks 순회공연을 가지게 되고, 그들의 이름으로 두장의 앨범도 내게 된다.

Hootenanny Singers의 가장 큰 매력포인트는 당시 유행하던 비틀즈 스타일의 반항적인 장발 스타일과 정반대인 깔끔하고 예절바른 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약진이후 곧바로 비요른은 포크뮤직에서 탈피하여 팝장르를 시도해보리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1965년의 첫번째 앨범-Hootenanny Singers sjunger Evert Taube("The Hootenanny Singers Sing Evert Taube, 한 스웨덴 작곡가에게 헌정한 앨범) 발표이후 그들의 음악적 추구방향을 천천히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비요른은 스웨덴과 다른나라의 포크뮤직을 서로 접목시켜서 최초로 포크/팝 장르로 작곡을 시도했는데, No Time(a Top Twenty hit), Time To Move Along은 의 네번째 앨범(해외발매)에 수록되었다. 이 앨범은 Bjorkens visa ("Song Of The Birch")같은 큰 히트곡이 담겨있다는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

1966년에 이르러 Hootenanny Singers는 더많은 콘서트와 Manga ansikten/Many Faces같은 또다른 앨범들을 계속 발표하는데, 이 앨범의 특징은 한면은 스웨덴어로 다른 한면은 영어로 된 곡들이 수록되었으며, 이것은 그들이 팝밴드로서 그들의 모습을 일신했다는 최후의 중요한 진보였던 것이다. 이 앨범에는 Marianne 같은 히트곡이외에 비요른의 작품이며 팝송인 Baby Those Are The Rules가 수록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후자인 Baby Those Are The Rules(국내에서 단편적이지만 뮤직비디오로 소개된 적이 있다)은 외국에서 많이 소개되었는데, 1964년에서 1966년 사이에 그들의 싱글은 영국,핀랜드, 노르웨이, 덴마크, 서독,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에서는 앨범도 출시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래는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Manga ansikten/Many Faces를 발표했을때인 1966년 늦가을 그룹 맴버중 3명이 군복무로 인해서 바쁘게 되었다(하지만 나머지 한명인 한시 슈바르츠는 독일시민권이 있었고, 그걸 이유삼아 군복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이 입대하기 하루전인 1966년 6월 어느날 그들은 환송파티를 열었는데 그때 스웨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the Hep Stars의 맴버들을 파티에서 초대한다(비요른과 베니가 파티석상에서 만났다더니 그게 알고보니 군바리 환송회 였더라...허허 :)

Hep Stars의 맴버중에 한명이었던 베니 안데르손은 이 파티에서 비요른과 후에 아바를 결성하게 되는 우정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해 여름 그들은 둘이서 처음으로 Isn't It Easy To Say를 공동작곡하게 되고, 베니는 Manga ansikten/Many Faces앨범의 한곡인Blomman ("The Flower")에서 세션으로 오르간 연주를 해주게 된다.

1967년 1월 Hootenanny Singers의 그해 첫번째 싱글이 발표되었다. En sang en gang for langesen(탐존스의 히트곡 Green Green Grass Of Home의 스웨덴어 번안곡)은 판매순위에서 2위까지 올라갔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Hootenanny Singers의 발표곡중 가장 큰 히트곡이 되었다.

그 결과로, 그후 몇년동안 Hootenanny Singers는 미국의 포크/컨츄리 곡들을 스웨덴어로 개사해서 많이 발표하였는데, Almost Persuaded (Borjan till slutet,챠트순위 4위) Five Hundred Miles Away From Home (Sa lange du alskar ar du ung, 7위)같은 곡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새로운 시도는 분명히 그들의 제대후 첫번째 앨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Civila ("Civilians")앨범에서는 참신함이 돋보이는 히트곡 ,Marten Gas ("Marten The Goose")와 그룹의 로드 매니저인 Hans의 서투른 리드보컬곡인 "Berka" Bergkvist가 대표적이다.

Civila ("Civilians")앨범이 발표될때인 1967년 가을엔, 이미 그들은 150회의 포크 순회공연을 마친 상태였다.

처음부터, 그룹의 맴버들은 그들의 음악활동을 일시적인 취미생활이라고 합의해두고 있었는데, 1967년 가을부터 맴버 전원은 대학에 진학해서 학업을 시작했다

Bjorn은 그들중 유일하게 음악활동에 전념하리라고 맘먹었다. 스톡홀름에 홀로 남게된 이후, 그는 소속 음반사에 대해서 그룹의 대리인으로 활동한다.

1968년 봄, 비요른은 그의 첫번째 솔로 싱글로, the Bobby Goldsboro의 히트곡 Honey의 스웨덴어 번안곡을 발표한다. 하지만 그는 그룹의 맴버로 활동도 게을리 하지않아서, Hootenanny Singers는 여전히 앨범발표와 순회공연을 계속하고 있었다

비요른의 다른 싱글로는 Froken Fredriksson (a Swedish version of Harper Valley P.T.A., 1968)가 챠트 순위10위를 차지했고, 그외에 Saknar du nagot min kara (a version of Where Do You Go To My Lovely, 1969)와 Partaj-aj-aj (1969년 비요른/베니 작사,작곡)이 있었다.

1968년 Hootenanny Singers의 첫번째 앨범은 Bellman pa vart satt ("Bellman In Our Way")이었는데, 이 앨범은 18세기 스웨덴 작곡가들에 대한 헌정음반이었다. 이것은 1970년 상반기 부터 발표되는 Hootenanny Singers 특유의 스웨덴 전통가요 앨범 시리즈의 출발로서 기록된다.

그러한 앨범들로서 Skillingtryck("Simple Folk Songs", 1970), Vara vackraste visor ("Our Most Beautiful Songs", 1971), Vara vackraste visor 2 (1972), Dan Andersson pa vart satt ("Dan Andersson In Our Way", 1973) and Evert Taube pa vart satt ("Evert Taube In Our Way", 1974)등이 있었다.

1968년 두번째 앨범 Fem ar ("Five Years")와 and 1969년의 Pa tre man hand ("A Group Of Three")는 Hootenanny Singers의 마지막 현대음악을 다룬 앨범이었다. 그렇지만 morden MOR song(역자주:이게 뭔지 저도 잘 모르겠심더)들은 그룹의 싱글로 계속 발표되었다.

이 후 앨범제작이 진행되고 있을때인 1969년 봄, 그룹에서 한명이 탈퇴하게 된다. Johan Karlberg는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는 자동차 관련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서 그룹을 떠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사건이 100회 가까이
진행된 그룹의 1969년 여름 포크송 순회공연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9년 순회공연은 향후 3년동안에 Hootenanny Singers의 마지막 투어 였다.

이때쯤, 비요른은 베니와 더욱 가깝게 지내며 음반작업을 계속하고 있었고, 1969년 가을 베니와 비요른의 첫번째 공동작품이 나오는데, 이 곡은 1970년 소프트 포르노 무비인 The Seduction Of Inga(잉가의 유혹~)에서 잉가의 테마로 발표된 She's My Kind Of Girl이다.

1970년경엔 계속 음반작업을 진행해서, 마침내 Hej gamle man! ("Hey Old Man!")이 수록된 앨범 the Lycka ("Happiness")가 제작되는데, 이 곡은 후에 아바의 맴버가 되는 바로 그 네명이 함께 작업한 최초의 곡이였다. 앨범이 발표된 1970년 말, 비요른은 아그네사와 베니는 프리다와 약혼을 하게 된다. 1970년 말 그리고 1971년 초에 그들 네명은 함께 무대에 Festfolk 캬바레 (역자주:우리하고는 좀 다른 의미인것 같습니다) 무대에 오르게 되지만 성공은 거둘 수 없었다.

1971년에는 비요른과 베니는 더 많은 싱글들을 발표하는데, (라디오 방송에서 크게 인기를 얻은 Tank om jorden vore ung,후에 If We Only Had The Time라는 제목의 곡으로 번안된다) 이것은 그들 둘이 파트너가 되어 폴라뮤직과 계약을 맺고 다른 아티스트들의 곡을 제작 해주는 것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였다.

1972년 3월, 아바의 첫번째 싱글곡 People Need Love가 녹음되었고, 비요른과 베니는 서서히 그들의 다른 계약들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 1972년 여름에 개최된 Hootenanny Singers의 포크 순회공연은 마지막 것이 되었다 - 이로서 아바는 70년대 음악사 중에 가장 커다란 성공적인 전설의 하나로 되어가고 있었다.

비요른과 베니는 작사가 팀 라이스와 함께 뮤지컬 체스에 쓸 곡을 작곡 하였고 이후 아바의 마지막 레코딩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그때가 1982년이었다. concept 앨범이 1984년 가을에 발매되었고, 1986년 5월 뮤지컬 체스는 런던 웨스트 엔드에서 그 막이 올랐다. 체스는 큰성공을 거두었고, 1988년에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성공을 재현하지는 못했고 개막 2달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뮤지컬 사업은 비요른과 베니가 팝뮤직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1985년과 1987년 비요른과 베니는 스웨덴 팝듀오인 Gemini의 두장의 앨범을 제작하였고 앨범 수록곡 대부분을 맡아서 작곡하였다

1990년, 비요른과 베니는 새로운 뮤지컬을 제작할 것을 결정했다. 새로 제작하는 뮤지컬은 전적으로 스웨덴어로 작사하기로 하였고, 그들 뮤지컬 원작으로는 Vilhelm Moberg의 이민이야기를 다룬 소설 시리즈를 선택하였다.

새 뮤지컬을 제작하는 도중인 1993년에는 스웨덴 가수 Josefin Nilsson의 앨범을 제작하기도 하였지만 신작 뮤지컬 Kristina fran Duvemala ("Kristina From Duvemala")는 1995년 공연되었다.

새 뮤지컬은 관객과 비평가 사이에서 모두 커다란 호평을 받았다. 뮤지컬은 3년동안 스웨덴의 3곳의 도시(Malmo, Gothenburg and Stockholm)의 여러극장에서 공연 되었고 1996년 10월엔 수록곡이 3장의 CD로 발매되었으며, 스웨덴 앨범차트에서 무려 1년이상 랭크되는 기염을 토했다.

1996년 가을엔 미국에서 뮤지컬 Kristina fran Duvemala 수록곡들의 콘서트가 열렸다. 이때 전곡은 영어로 번안 되었으며 이것은 나중에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될 다음작품 을 위한 것이었다. 사실 이때 비요른은 신작 뮤지컬 마마미아의 제작에 관여하고 있었으며, 뮤지컬 마마미아는 아바의 노래를 바탕으로 하여 1999년 4월 영국 런던에서 공연되었다.

Kristina fran Duvemala 프로젝트는 전적으로 비요른은 작사부분을 베니는 작곡부분을 담당하여 제작한 첫번째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인해 평론가들은 그들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비요른은 지금 현재 음반제작자 보다는 스웨덴 최고의 작사가의 한명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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