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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 Seeger 피트 시거

P 조회 수 1739 추천 수 0 2007.07.04 16:27:18



모든 음악이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포크음악은, 포크(folk)란 단어의 의미 그대로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쉽고 편안하게 불리어진 음악을 뜻한다. 포크음악은 미국에서 역시 그 어떤 장르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속성은 1900년대에 들어와 '모던 포크'라는 대중음악의 양식으로 적절히 다듬어져 계승되었고, 이 음악 장르의 민중 지향적 성격은 일반 대중들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들의 사회적 재현으로 종종 나타났다.

20세기 초 경제 공황과 제국주의 전쟁 등 자본주의 발달로 인한 체제상의 결과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이러한 구조적 변화의 중심부에 있던 민중들은 사회적 불만의 예술적 해소 및 표현 양식으로써 포크음악을 자신의 삶으로 더욱 끌어왔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현재 즐겨 듣는 포크음악이란 20세기 중후반을 거치며 상당 부분 정제된 형태로서의 음악 장르이지만, 여전히 포크음악 본위의 성격에 대한 돌아봄은 유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지금부터 알아보게 될 미국 모던 포크(얼반 포크)의 창시적 음악가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소사(小史)는 그 무엇보다 생생한 포크음악계의 정신적 역사물로서 큰 가치를 지닐 터이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요하자면, 피트 시거의 인생은 현대 미국 포크음악의 탄생과 성장의 궤적에 상당 부분 포개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피트 시거라는 한 개인의 역사를 거칠게나마 되짚어보며 현재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밥 딜런(Bob Dylan)과 존 바에즈(Joan Baez), 그리고 김민기와 한대수 등의 국내외 포크 싱어들에 대한 시대적 이해 또한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이다.



5월 3일은 피트 시거가 태어난 지 만 87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9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민요에 조예가 깊었던 음악학자 아버지 찰스 시거와 역시 음악 교수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어머니 콘스탄스 시거의 영향 아래 어릴 적부터 다양한 민중 음악을 듣고 또 연주하며 자랐다.

그러다 1938년 하버드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던 중 갑작스레 대학 중퇴를 결심하게 되고,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미국 각 지역의 전통적 포크송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향후 그의 음악적 동반자가 되는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를 만난다.



시거와 거스리는 다른 몇몇 뮤지션들과 함께 알마낙 싱어스(Almanac Singers)라는 그룹을 만들고 1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적극적인 음악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알마낙 싱어즈의 해체 이후 피트 시거는 1948년, 포크 그룹 위버스(The Weavers)를 결성한다.



당시 [Kisses Sweeter Than Wine], [On Top of Old Smoky]와 같은 곡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이때 이들이 불렀던 노래 중 하나가 토큰스(Tokens)의 히트곡 및 영화 '라이언 킹'의 삽입곡으로 유명한 [Wimoweh]라는 곡이다. 이 남아프리카의 토속 음악을 처음으로 채집하여 레코드로 발표한 팀이 바로 위버스였다.)



한편 이들의 음악은 포크 본연의 의미를 중시하여 민중 중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때론 각종 공연을 통해 억압적인 파시즘을 비난하고 노동 운동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피트 시거를 비롯한 멤버들은 국가기관인 FBI의 감시와 탄압을 종종 받기도 하였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 관해 노래를 하려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들에 관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 노래한다. 내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변화하고 있는 대중의 힘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노래할 수 있다. 우리에겐 프로페셔널한 가수도, 스타도 필요치 않다.'라는 시거의 말을 어릴 적 공연장에서 듣고 크게 감명 받은 바 있었다는 '포크의 여신' 존 바에즈의 후일담은 유명하다.



흥미로운 점은, 피트 시거가 1950년에 시작된 한국 전쟁에 보병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1951년 한국 땅을 밟은 그는 남과 북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싸우는 격전의 현장 속에서, 남측과 북측의 군인들 모두가 같은 민요인 '아리랑'을 부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시거는 '남북이 하나가 되어 부르는 상징적인 노래'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사람들 앞에서 [Ariran]을 불렀다.

들어보신 분은 느끼셨을 테지만, 그의 차분하고도 자유로운 창법을 통해 나지막이 들려오는 '아리랑'의 선율은 꽤나 생경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진한 여운을 남긴다. 포크음악 특유의 진솔한 감수성이 국가나 민족 사이에 존재하는 화성상의 차이조차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피트 시거는 그가 즐겨 사용하던 밴조(banjo, 기타와 비슷한 형태의 5현 악기)에 맞춰 포크 넘버로 편곡했고, 이 곡은 음반으로 제작되어 당시 미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한반도의 비극을 목도한 후 미국으로 돌아간 피트 시거는 위버스를 탈퇴하고 드디어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 해가 1958년, 미국 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던 매카시즘의 잔영이 남아있었고 베트남 전쟁에서의 참혹한 살육전이 예상되던 시기였다. 시거는 60년대에 걸쳐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쳐나갔다. 마틴 루터 킹이 주도한 시민권 운동서부터 여성, 인종, 반전 등 여러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 개입했다. 그는 저항의 목소리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던 음악인이었고, 이즈음 소위 '프로테스트(protest) 송'이라는 포크음악의 세분된 명칭이 새삼스레 출현하기도 하였다.

포크음악은 '현장의 음악'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세계 여러 지방의 민요를 가져와 부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해당 곡의 원작자가 누구이건 간에 그것이 현장 속에서 저항의 연대를 이룩할 수 있다면 그 곡은 누가 불러도 문제 될 게 없었던 것이다. 피트 시거 또한 저작권 개념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노래를 불렀다. 그 대표적인 곡들이 바로 [We Shall Overcome](19세기 가스펠송)이나 [Guantanamera](쿠바 민요), 그리고 [This Land Is Your Land](우디 거스리 작곡)다. 한편, 후에 더 버즈(The Byrds)가 리메이크하여 인기를 끌었던 [Turn!, Turn!, Turn!]이나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같은 곡들은 피트 시거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들어서도 노령의 나이로 간간이 무대에 오르며 자유와 평화의 주제를 담은 노래들을 부르고 있다. 혹자는 더 이상 포크음악에 있어 정치적 구색의 틀을 고수하려는 건 철지난 자세일 뿐이라 말할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21세기 현재의 포크음악은 결코 '저항음악'으로 해석되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피트 시거의 음악적 태도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단지 전통 포크음악을 충실히 계승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에게 있어 음악은 곧 삶이었고, 그 삶은 결국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는 음악과 삶이라는 두 영역의 연관성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미국 혹은 대한민국의 6, 70년대 포크송들이 담당했던 역할만큼이나 지금도 전 세계에는 전통적 의미의 포크음악이 여전히 유효할 지역과 사회가 있을지 모른다. 그 곳에도 지금 이 순간 피트 시거와 같은 음악인이 노래를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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