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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ky Leandros(비키 래안드로스)

V 조회 수 1913 추천 수 0 2005.09.27 18:53:32




'유럽 방송연맹 EBU'이 각 회원국간의 문화교류와 유행음악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창설한 것은, 지금부터 29년 전인 1955년이었다. 그동안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이름 그대로 유로비전 네트 워크에 의해 전유럽은 물론, 북부 아프리카와 철의 장막을 넘어 소련 지역에까지 걸쳐 약 4억의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계 최대의 가요제로 상징되어 왔다.
  1951년에 창설된 '산 레모 가요제'가 이탈리아의 칸초네라는 지역적인 민속음악의 특색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는데 비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세계의 유행음악계에서 보다 특별한 의미를 지녀 왔다. 왜냐하면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봅 딜런, 존 덴버 등의 전설적인 슈퍼스타들이 군림했던 영미의 팝 뮤직이 1950년대와 '6O년대의 세계 무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면, 새로운 '80년대는 유로팝스의 르네상스로 막을 열었고 그 역사적인 전환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다름아닌 우도 유르겐스, 프랑스 갈, 비키, 아바 등 불멸의 성좌군이 그 이름을 찬란하게 빛낸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로팝스의 전통은 샹송 ·칸초네의 퇴조라는 시대적인 위기를 용케 극복하고, 오늘날 아바, 보니 엠, 데미스 루소스, 징기스칸 등으로 자연스럽게 계승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는 '70년대 후반부터 세계 팝 뮤직의 새로운 메카로 요란스럽게 회춘하기 시작한 유로팝스를 상징하는 축제로서의 의미를 찾아블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지금부터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4월 8일, 이 날은 몇 가지 이유에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역사를 통하여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지난해 우승한 나라가 다음해의 개최지가 된다는 대회 규정에 따라, 1967년도 제12회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전해 룩셈부르크 대회의 우승자 우도 유르겐스의 모국인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축제의 무대를 옮겨 유서 깊은 임페리얼 팰리스에서 막을 올렸다. 영국 ·프랑스 ·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17개국이 저마다 자기 나라의 대표적인 음악 사절을 보낸 온 가운데 열린 임페리얼 팰리스의 화려한 무대에는 '꼭두각시 Puppet on a string'를 불러 그랑프리를 차지한 영국 대표 샌더 쇼, 2위의 아일랜드 대표 숀 더피, 3위의 프랑스 대표 노엘 코르디에와 나란히 맑고 초롱초롱한 눈과 깜찍한 표정이 마치 인형과 같은 귀여운 소녀가 4위의 수상자로 호명되어 대회장을 열병과 같은 무드로 감쌌다. 룩셈부르크 대표로 출전한 이 소녀 가수는 새하얀 이를 드러낸 환한 미소를 뿌리며 무대에 나타나 이들 못지않은 풍부하고 개성있는 목소리로 당당히 노래를 불러 관중들을 사로잡았으나, 결과는 아쉽게도 4위에 그치고 말았던것이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역사에서 소녀 가수에게 입상의 영광이 주어지기는 이것이 세번째였는데, 그것은 2년 전인 1965년, '꿈꾸는 샹송 인형 Poupee de cire, poupee de son'을 부른 프랑스 갈이 18세의 어린 나이로 그랑프리의 영광을 차지한 후의 일이었다.
   그럼 그 귀여운 17세의 소녀 가수는 과연 누구였을까? 비키.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비키 레안드로스이다.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빼어난 여가수로 벌써 20년 이상 스타덤을 차지하고 있는 비키는, 어린 마음에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결과가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사실에 적지않게 실망했으나 그녀의 행운은 달리 있었다. 비키가 유로비전에서 노래한 4위의 입상곡 '사랑은 푸른빛 L'amour est bleu'의 세계적인 히트가 바로 그것이다. 이듬해인 196B년 1월 프랑스의 폴 모리아는 이 곡을 특유의 화려하고 유연성 있는 현악 사운드와 경쾌한 로크 비트를 가미해 생동감이 넘치도록 편곡하여 발표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해 2월 10일부터 연속 5주간 미국의 히트 퍼레이드에서 톱을 장식함으로써, 이른바 전세계적으로 '사랑은 푸른빛'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경이적인 일이었다. 동시에 비키와 폴 모리아의 이름은 크게 부각되었다. '사랑은 푸른빛'은 비키와 폴 모리아의 이름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럭키 넘버로서 잊을 수 없는 명곡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유로비전 승 콘테스트는 비키의 경력에서 빠뜨릴 수 없는 화려한 데뷔의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불과 17세에 유로비전의 무대에서 국제적 신인 여가수의 넘버원이 되었고, 그로부터 5년 후인 1972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그대 떠난 뒤 Apres toi'를 불러 마침내 제 17회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49년 8월 23일, 그리스의 이름 높은 관광지 골프 섬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비키 바실리키 파파사나슈‥‥‥ 그리스의 인기가수로 보컬그룹 '화이브 롭스'의 리더였던 아버지 레오 레안드로스 파파사나슈는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비키가 5세 때 아버지 레오는 가족을 이끌고 아테네로 옮겨가, 그녀는 어린 시절을 그리스의 고도에서 파르테논의 기둥을 어루만지며 평온하고 행복하게 성장했다. 그러다가 1957년, 레오 일가는 아테네에서 북부 독일의 함부르크로 이사했다. 레오는 음악 생활의 기반을 넓히기 위해 아테네를 떠난 것이다. 그때 비키는 9세였는데 그 나이에 벌써 별스럽다고 할 정도로 노래에 관심을 보였다. 비키를 말할 때 그녀의 아버지 레오 레안드로스 파파사나슈의 존재를 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달리 표현하면, 레오 없는 비키의 성공은 상상하기 힘들다. 비키가 가수의 길로 들어선 데에는 어린 딸의 재능을 발견하고 가수로서 키우려는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딸의 인생의 방향을 가수로 결정한 레오는 곧 엄격한 기초교육을 시작했다.
   비키는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에 모국어를 말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함부르크의 여학교 시절을 통해 그녀는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레오에게는 비키의 뛰어난 어학 실력과 관련해서 연상되는, 또 다른 치밀한 계획이 있었다. 즉 앞으로 펼쳐지는 시대에는 대중예술의 스타들이 놀라울 만큼 빨리 세계적인 미디아에 의해 클로즈 업 될 것이고 스타로 각광을 받을 것이라는, 실로 경탄할 만한 혜안이었다. 여기에 착안한 레오는 비키를 스케일이 큰 국제적인 탤런트로 키우기 위해 엄격하고 피나는 어학 공부와 음악 훈련을 시켜 나갔다. 그리고 비키는 영리하게 아버지의 요구에 가장 충실하게 부응하여 오래지 않아 기회는 도래했다. 1965년 2월 마침내 비키는 데뷔곡 '나이프, 포크, 가위와 빛 Messer, Gabel, Schere, Licht'을 발표해 가수로서의 화려한 스타트를 했다. 독일어로 노래한 그녀의 데뷔곡은 유럽 각국에서 대단한 반향을 받았다. 생기있고 발랄한 목소리의 매력 이상으로 비키라는 신인의 청순한 미모 또한 절찬을 받아 스타로서의 지위를 결정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비키가 지금은 34세, 참여성의 맛이 감도는 화사하고 요염한 목소리의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다. 데뷔 시절 '카사비앙카 Casa bianca'를 노래할 때의 그 소녀다운 귀여움, 야무지고 청순한 무드가 감돌던 목소리에 비하면, 지금은 30대의 중반에 접어든 나이에 어울리게 여인의 성숙함이 더욱 눈부신 빛을 발산하고 있다.
   오늘날 비키는 명실공히 '유로 팝스'의 대표적인 스타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스타는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착실히 어학과 노래의 기초를 연마했던 만큼, 그녀가 들려 주는 모국어인 그리스어는 물론 영어 ·독어 ·불어 · 이탈리아어 가사의 다양한 레퍼터리는 정말 매혹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들을 그녀의 팬으로 잡아 끌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을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의 풍부함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결코 감미롭다고는 할 수 없는 약간 쉰 듯한 그 음색과 드라마틱한 표현에 의한 '사랑을 해왔지요 Ich hab' die liebe geseh'n' '테오여, 로츠로 가자 Theo, wir fahren nach Lodz' '부주키를 켜면서 When Bouzoukis played' '그곳에 그대를 위해 있겠어요 Ich bin fur dich da' 등의 히트 송은 비키 본래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 하면서 팬들과의 공감의 밀도를 더욱 짙게 했던 곡들이다.
   비키는 그녀의 고유한 가창 스타일을 지녔다기보다는, 그때 그때 신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뛰어난 표현력 속에 노래의 감정을 표출하는 남다른 재능을 가진 가수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아무리 성격이 다른 곡일지라도, 샹송이건 팝송이건, 그에 구애되지 않고 거침없이 노래부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와서 유럽의 음악계에는 많은 신인 스타들이 배출되고 있지만, 비키가 여전히 그 인기를 유지하며 톱스타로 활약하고 있는 것은 역시 코스모폴리탄다운 다양한 레퍼터리의 선택에 있다 할 것이다.
  벌써 20년 이상 노래불러 왔지만, 그녀의 가수로서의 생애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출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것이다. 부기(附記)한다면 비키의 개성과 음악적 프로필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해온 아버지 레오는 여전히 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매니저 ·작곡 ·편곡가로 음악에의 정열을 활활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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