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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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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a Bocelli

A 조회 수 1697 추천 수 0 2005.09.07 13:17:39


보첼리는 1958년 9월 22일 이탈리아 투스카니(Tuscany) 지방의 포도와 올리브를 재배하던 시골가정에서 태어났다. 자신을 스스로 '시골의 소산'이라고 묘사하는 그는 자신의 품성과 성격이 투스카니의 가족 생활 그리고 시골의 문화와 전통에 상당 부분 은혜입었다고 생각한다. 언뜻 보기에 구도자 같은 그의 모습은 그만큼 자연과 가족, 음악에 둘러 쌓였던 투스카니의 목가적인 생활에 의해 양육된 것이다.
일찍부터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보첼리에게 그의 부모는 시골의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강습을 시켰으며 친구들은 그를 격려했다. 오페라 가수의 꿈을 키워가던 그는 당시 오페라 아리아와 이탈리아 가곡들을 섭렵했고, 프랑코 코렐리(Franco Corelli) 같은 유명 이탈리아 테너들에게 빠져들었다. 그 덕에 어릴 때 이미 보첼리의 목소리는 그 지방에서 정평이 나기 시작했다.
앞길이 창창했던 그는 그러나 불행히도 12살 때 시력을 잃게 된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단순한 사고였다. 축구를 하던 도중 머리를 부딪혔고 그 때 뇌를 다쳐 점차 시력을 잃게 되어 결국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분명 엄청난 시련이었지만 보첼리는 주저앉지 않았다. 오페라 가수의 꿈을 일단 접고 그는 '피사(Pisa) 대학' 법대에 진학했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 잠시동안 법정 선임 변호사로 활동했다.
변호사 생활을 하던 그는 차츰 음악에 열정이 다시 피어오르는 걸 느끼고 과감히 변호사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안드레아 보첼리의 아버지는 그의 결정에 극구 반대했다.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지만 몸도 불편한 아들이 과연 다른 쟁쟁한 성악가들과 경쟁해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한 것이다. 그래도 안드레아는 아버지를 거역하고 결국 가수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보첼리 부자의 상처는 무척 컸으며 그래서 한동안 관계가 단절됐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염려는 사실상 기우였다. 멀지 않은 훗날, 아들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세계 정상의 테너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관계 개선을 간절히 바랐던 안드레아 보첼리는 1999년 앨범 [Sogno]에 수록한 '아버지께(A Mio Padre)'라는 곡을 통해 비로소 화해를 청했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낭독하는 형식으로 된 이 곡을 듣는 순간 안드레아의 아버지와 온 가족은 눈물 바다가 되었고 그 부자는 극적으로 화해했다. 그러나 사랑의 기쁨도 잠깐. 이듬해 그의 아버지는 영면(永眠)했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가수의 길에 접어든 보첼리는 우선 그의 영웅 프랑코 코렐리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수련을 쌓기 시작했다. 1992년 'Miserere'란 곡의 데모 작업에 참여하면서 그의 음악 생활에 여명이 동튼다. 벨 칸토 창법에 충실하면서도 부드러우며 공명하는 비브라토가 특징인 보첼리의 목소리는 이탈리아의 대표급 록 뮤지션 주케로(Zucchero)와 파바로티에게 크나큰 감명을 준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파스빈더의 영화 제목이 떠오르기도 하는 그의 슬픔 어린 음성은 곧 레코드사에도 알려지고 그 때부터 보첼리는 마음껏 그의 재능을 펼쳐 보이며 승승장구한다.
1994년 이탈리아 팝 음악제인 '산 레모 송 페스티벌'에서 'Il Mare Calmo Della Sera'란 곡으로 우승한 그는 자국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되었다. 같은 해 데뷔 앨범을 발표한 그는 이듬해 드디어 국제적 지명도를 얻게 되는 발판을 마련한다. 두 번째로 내놓은 앨범 [Bocelli]에서 싱글 'Con Te Partiro'가 크게 히트했고, 그 곡은 얼마 후 사라 브라이트만과의 듀엣 곡 'Time To Say Goodbye'로 번안되어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은 독일의 세계 라이트 헤비급 권투 챔피언 헨리 마스케의 은퇴 경기에서 불려진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1997년 영어권 국가들을 겨냥한 세계무대 데뷔 앨범 [Romanza]를 출시했고, 'Time To Say Goodbye'가 실린 그 앨범은 예상대로 1천8백만 장이 팔리며 유럽 전역뿐 아니라 미국의 팝 수요자까지 만족시켰다. 이어 1999년에는 '꿈'이란 뜻의 두 번째 크로스오버 앨범 [Sogno]가 발매 즉시 빌보드 팝 차트 5위 내에 진입하는 경이를 연출했다. 셀린 디온, 이탈리아의 국민가수 에로스 라마조띠 같은 팝 가수들이 듀엣으로 참여한 이 음반은 대중들에게 더욱 더 눈 높이를 맞춰 훌륭한 팝 음반으로 평가받았다.
더욱 놀랍게도 그 앨범이 발매되고 미국 팝 앨범 차트 상위권에 오르자 동시에 그의 앨범 4장이 모조리 차트에 등장했다. 이는 1987년 U2, 1992년 가스 브룩스 이후에 첫 번째 위업이었다. 셀린 디온과 함께 한 '아카데미' 시상식 축하 공연, 또 '그래미' 공연 등을 지켜본 미국 언론들은 그의 팬들에게 '보첼리매니아'(Bocellimania)라는 의미 있는 문구를 붙였다(여태껏 이런 문구를 붙인 예는 비틀스나 그레이트풀 데드 정도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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