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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Pourcel(프랑크 푸르셀)

F 조회 수 2380 추천 수 0 2005.09.27 18:21:11


감미로운 선율의 마술사

   지중해에 면한 프랑스의 항도 마르세이유- 마르세이유 하면 미국의 죠슈아 로건 감독이 1961년에 발표한 비련의 영화 '화니 Fanny'가 절로 생각난다. 프랑스의 극작가 마르셀 파니올의 무대극을 영화화한 '화니'는 마르세이유의 항구를 무대로, 바다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청년과 그 청년에게 사랑을 바친 가련한 처녀,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주위에 배치된 선창가의 서민들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마르세이유 기질이라고 할 수 있는 항구의 비련과 인정 그리고 약간의 에로티시즘을 가미한 유머러스한 대사가 꽤나 팬들의 눈물과 비애를 자아냈던 작품이었다.
  영화 '화니'의 무대는 마르세이유에서도 이 항구의 광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포구처럼 된 구항(舊港)의 언저리였다. 크고 작은 레스토랑이 즐비하고 가게 앞에 갓 잡아온 싱싱한 새우나 생선들을 벌여놓고, 소리소리지르며 손님을 불러들이던 억척스럽고도 진취성이 강한 마르세이유의 서민들‥‥ 같은 프랑스인일지라도 남쪽 태생이냐, 북쪽 태쟁이냐에 따라 기질이 판이하다. 어딘가 새침한 데가 있는 파리지앵에 비해 마르세이유 사람들은 탁 트였고 명랑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여러 분야에 진출해서 크게 활약하고 있는데, 특히 음악 분야에서는 그 개방적인 성격 덕을 한몫 본다. 특히 샹송계에는 남프랑스 출신들이 많다는 점을 지나칠 수 없다. 자유분방한 수법으로써 샹송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킨 샤를 트레네는 남프랑스의 나르본느 출신이고, 다이너미즘을 도입한 질베르 베코는 마르세이유 가까운 군항 툴롱 태생이다. '제2의 에디트 피아프'라고 불리는 미레이유 마티유는 마르세이유 서북쪽 아비뇽 출신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프랑스 무드 음악의 터주대감 프랑크 푸르셀 ·폴 모리아가 이곳 마르세이유 출신이라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프랑크 푸르셀은 '화니'의 무대가 되는 구항 바로 인접한 상 빅토르 광장에 살았다. 폴 모리아가 살던 집과는 불과 20미터 거리밖에 안 떨어진 곳이다. 그러나 마르세이유 시대에는 서로 면식이 없다가, 알게 되어 동향(同鄕)의 우정을 나누게 된 것은 그들이 파리로 간 뒤의 일이다. 하긴 프랑크 푸르셀은 1913년 1월1일생, 폴 모리아가 그보다 무려 12년이나 연하이고 보니 설사 이웃이었다 하더라도 소꿉친구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51년 프랑크 푸르셀이 오랫동안 반주를 맡았던 샹송가수 뤼시엔느 브와이에와 헤어져서 독립을 선언하고 자기의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새로운 출발을 했을 때, 이 악단에 피아니스트로 참가한 것이 다름아닌 폴 모리아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2년 프랑크 푸르셀 그랜드 오케스트라가 '블루 탱고 Blue tango'와 '라임라이트 Limelight'를 취입하여 화려하게 레코드계에 데뷔했을 때, 폴 모리아 대신 피아노를 담당한 것이 미셀 르그랑이었다.
   프랑스 무드 음악의 선구자로서의 프랑크 푸르셀의 역사적인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 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프랑크 푸르셀은 프랑스계와 이탈리아계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그의 부친은 해군 군악대장이어서 어릴 때부터 음악에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는 4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곧 고향 마르세이유 음악원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았다. 물론 장차 뛰어난 콘서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성공에의 길은 하나뿐이 아니고 운이 어디로 굴러다니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법. 꿈과 실행의 거리가 바로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이 된다. 프랑크 푸르셀의 운명도 그러했다. 마르세이유 음악원 시절을 보내고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마당에서, 청년 프랑크 푸르셀은 아무런 주저없이 꿈의 도시 파리행을 결심했다. 음악계의 스타는 아직 먼 장래의 일이었으므로 그는 공부를 더해서 실력을 쌓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가 다시 파리 음악원에 들어간 것이 18세 때였다.
  수년 뒤 파리 음악원을 졸업한 프랑크 푸르셀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제 나이도 상당히 들고 공부도 할 만큼 했다. 이쯤에서 뭘해야 할지 신중히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음악원은 졸업했지만 당장 바이올린으로 대도시 파리에서 먹고 살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일자리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여 고향으로 마의환향하기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고향으로 돌아온 프랑크 푸르셀은 마르세이유 오페라 하우스에 들어가 꼬박 2년간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로 일했다. 그러다가 로시니나 베르디, 마스네를 보면(譜面) 그대로 연주하는 몰개성적인 클라식의 세계가 따분하다고 느껴 아르바이트를 겸해 어느 작은 카바레에서 타악기를 두드리게 되었는데, 그가 유행 음악의 창조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이 이무렵이었다.
  마르세이유에는 '오데옹'이라는 이름의 소극장이 있다. 영화관겸 뮤직 흘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상영되는 막간에 가수나 코미디언들이 나와 실연을 공개하는 곳이었는데, 마르세이유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시작한 프랑크 푸르셀이 얻게 된 일자리가 바로 오데옹극장 전속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오데옹에는 파리에서까지 여러 탤런트들이 찾아와서 공연했고, 본고장 마르세이유 출신들에게는 출세의 등용문이 되기도 했다.
  1943년 그곳 오데옹 극장에 노래하러 온 것이 당대의 인기 샹송 가수 뤼시엔느 브와이에였다. 푸르셀은 그녀가 전속 바이올리 니스트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오디션을 받았다. 결과는 좋아서 그는 뤼시엔느 브와이에의 반주자가 되어 그로부터 8년 동안 유럽과 미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1952년은 프랑크 푸르셀에게 있어서 운명의 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크 푸르셀에게는 일찌기 하나의 꿈이 있었다. 그것은 스트링을 중심으로 한 그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실로 오랜 숙원이었다. 그리하여 1952년 나이 39세가 되었을 때, 프랑크 푸르셀은 신념을 가지고 이 계획을 추진했다. 이렇게 해서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일류 연주가들이 주축이 된 프랑크 푸르셀 그랜드 오케스트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는 현악기를 중심으로 한, 엘리간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만토바니나 프랭크 책스필드 오케스트라가 절대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감상용 경음악 생활의 배경음악으로서의 무드 음악이 붐을 이루고 있었다. 프랑크 푸르셀 역시 만토바니 스타일의 우아하고 감미로운 무드에 재즈적인 리듬감과 프랑스적인 멋을 가미시킨 새로운 스타일의 무드 음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연주곡으로 히트한 '나의 죄 Mea culpa'란 곡을 들어보면, 만토바니 감각의 감미로운 우수에 가득찬 현악기가 흐름을 끌고 가면서 재즈적인 연주로 멜로디를 연주하는 엘토 색소폰, 그리고 리듬감이 샅아 있는 듯한 감각, 이런 편곡이 그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만토바니 오케스트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현대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연주 형태였다.
   그런 의미에서 만토바니 ·프랭크 책스필드가 무드 음악의 싹을 심었다면,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등장한 프랑크 푸르셀은 무드음악의 개화기를 연 주역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오늘날과 같은 프렌치 팝스의 기틀을 확고히 하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70년대로 접어들면서 '60년대의 로크 음악을 호홉하며 자란 세대들이 어쩔 수 없이 그들 자신이 경원했던 기성세대로 변모하기 시작하면서, 이들도 연령감각에서 오는 생리적 변화 때문에 비트가 강한 음악보다는 가볍고 아름다운 음악을 찾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샹송에 다시 관심을 보이면서도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를 원했다. 이미 과거의 감각으로는 이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로크 음악의 바이탈리티가 체질화되었으면서도, 프랑스적인 우아함을 기대하는 이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노래보다는 오히려 연주 음악 쪽이 적합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아름답고 매끄러운 현악기들이 멜로디를 이끌고 나가면, 이 멜로디에 젊은 감각을 느끼게 하는 로크 비트가 뒷받침되면서 형성되는 독특한 연주 형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사운드를 '프렌치 팝스 French pop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레이몽 르페브르, 카라벨리 등을 탄생시킨 프렌치 팝스는 폴 모리아라는 천재의 등장으로 그 분수령을 이루었지만, 이들의 대선배격인 프랑크 푸르셀도 스스로의 연령과 시대에 호응하여 강한 의욕을 갖고 무드를 바꿔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에 와서는 어느새 71세의 고령인데도 나이답지 않게 태연하게 최신 팝송을 소화시키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더구나 근년에 와서 다시금 샹송과 클라식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감각의 네오 로맨티시즘이 부흥하여, 그는 또다시 본래 지니고 있던 특성을 백분 살려서 '페이징 사운드 Phasing sound'를 시도한다든가, 새로운 전자악기를 동월한 전위적인 감각과 고전적인 현악기의 조회를 호연(好演)하면서 거장의 자리를 계속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폴 모리아는 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프랑크 푸르셀은 지금의 시점으로 볼 때 새롭다고 할 순 없겠지만,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길을 열어 준 소중한 분이다. 자기의 캐리어를 소중히 지키고 있는 지적인 분이다. 그리고 마음으로 쓰는 듯한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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