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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a Vista Social Club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B 조회 수 3162 추천 수 0 2005.09.21 20:20:44


쿠바 출신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입니다. 1997년 처음 등장한 이래, 쿠바음악의 최고봉이라 소개가 되고 있는데요. 원래 이들은 1959년 1월 1일, 쿠바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이름의 클럽에서 연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약 38년 이후에 드라마틱한 사연과 음악과 예술혼을 안고, 다시 등장한 것이죠.

오늘은 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뻔한 이야기들 말고, 이들이 과연 쿠바 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긍정적인 역할만 했는가, 이 사람들의 숨겨진 음악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드릴까 합니다.


 Ibrahim Ferrer 1927년 출생 


사교클럽의 댄스파티에서 탄생한 이브라임은 그의 출생이 음악과 밀접했던 만큼 평생을 음악에 파묻혀 살았다.
            
1941년부터 가수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산티아고 현지 밴드들과 노래를 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파초 알론 소(Patio Alonso)'의 밴드에서 보컬로 활약했고, 그때부터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쿠바 음악의 전설로 남을 '오르케스타 데 차핀(Orquesta de Chapin)'과 베니 모레(Benny More)와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다.
알론소의 밴드는 마침내 1959년에 하바나로 이주했고 이브라임은 20년이 넘도록 그들과 함께 활동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알론소의 밴드는 '로스 보쿠코스(Los Bocucos)'로 알려져 있었고 커피열매를 빻는 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필론 리듬을 발명해 유행시키기도 했다.
오늘날 이브라임은 구 하바나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의 거실에는 나자로 성자(Saint Lazarus) 또는 바발루아예(Babalu-aye)를 위한 제단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발루아예는 아프리카 출신의 카톨릭 성자 중 하나로 쿠바의 산테리아(Santeria)교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다.
신앙심이 돈독한 이브라임은 매일같이 그의 제단을 초와 장식용 전구 그리고 생화로 꾸민다. 월드써킷 세션에 시골 사람과 같은 이미지의 소네로가 필요하게 되자 이브라임은 매일같이 산책을 하던 길 한복판에서 납치되다시피(?) 하여 기용되었다.

 Ruben Gonzalez 1919년 출생  
루벤 곤살레스는 쿠바 음악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클래식 피아니스트나 의사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인물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반세기가 넘도록 쿠바 음악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 새로운 경향과 스타일을 창조해왔다. 올해 77세인 루벤은 1934년에 시엔푸에고 음악학교
(Cienfuego Conservatoire)를 졸업한 뒤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연주가로 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그의 피 속에 흐르는 쿠바 음악의 리듬 특히 쏜(son)에 대한 열망을 주체하지 못했다. 결국 1941년에 의학공부를 포기한 루벤은 하바나로 이주하여 전업 연주가로 변신한다.
그로부터 1년이 채 되지 않아 위대한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Arsenio Rodriguez)'에 합류하는가 하면 '로스 에르마노스 오케스트라(Orquesta de Los Hermanos)'에서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와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40년대의 쿠바에는 진정한 음악인으로서의 삶이 있었습니다.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연주를 했지요."라고 루벤은 과거를 회상한다. 오늘날 40년대의 쿠바 음악계를 주름잡았던 피아니스트 트리오 중 생존해 있는 것은 루벤 뿐이다. 타계한 루이스 '릴리' 마르티네스(Luis 'Lili' Martinez)와 페루친(Peruchin)은 맘보를 발전시키고 모던 재즈의 선율을 흡수함으로써 쿠바 음악의 변천을 주도했었다. 그러기에 루벤은 말한다. "지금 우리가 듣는 쿠바 음악의 모든 것은 사실 과거의 그 찬란했던 시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편, 루벤은 그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했다. "아르세니오는 내게 말하곤 했었죠. '다른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신경쓰지 말아.'라구요. 다른 연주자들의 음악과는 다른 나만의 음악을 연주해서 '아, 루벤의 음악이야.'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라고 충고했었죠."


파나마와 탱고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했던 아르헨티나에서의 시간을 뒤로 하고 루벤은 하바나로 돌아왔다. 그리고 트로피카나를 비롯한 여러 클럽에서 캬바레 밴드들과 함께 연주했다. 1960년대 초반이 되었을 때 루벤은 차차차를 발명한 엔리케 호린(Enrique Jorrin )과 한 팀이 되어 그로부터 25년 동안을 함께 활동했는데 1980년대 중반에 호린이 죽자 잠시 루벤이 밴드의 리더 역할을 맡았다. 가중된 책임을 달가워하지 않은 루벤은 곧 은퇴하였고, '아프리카-쿠바 올 스타즈(Afro-Cuban All-Stars)'와 라이 쿠더의 강렬한 유혹이 있기까지 무대에 서지 않았다.


"집에 있던 피아노를 없앤 터라 에그렘 스튜디오의 피아노를 보자마자 곧장 피아노로 달려갔지요. 그 피아노도 날 알아보는 것 같았어요."라고 루벤은 말한다. 77세의 고령이 되어서야 루벤은 솔로 앨범을 내자는 제의를 받았다.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을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와 처음 레코딩 스튜디오에 발을 들여놓은 지 43년 만에 겨우 착수하게 된 것이다. 라이 쿠더는 루벤을 간단명료하게 평했다. "내 평생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라고.

 Compay Segundo 1907년 출생 

이제 겨우(?) 아흔살인 콤파이 세군도는 쿠바 음악사의 중추인물이자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는 여전히 열정과 재치 그리고 에너지가 넘치는 음악을 만들고 있다.
콤파이는 시보니 섬 동쪽의 산악지역에서 태어나 쏜(son)의 발생지인 산티아고에서 자랐다. 본명은 프란치스코 레필라도(Francisco Repilado). 그는 1920년대에 이미 훌륭한 기타리스트이자 트레스(tres) 연주자로 성장해 있었다. 낮에는 담배농장의 일꾼으로 아니면 이발사로 일하고 밤에는 근처 바에서 신도 가라이(Sindo Garay)나 니코 사키토(Nico Saquito )와 같은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했다. 15세에 그는 그의 첫 자작곡 [요 벵고 아키(Yo Vengo Aqui)]를 썼고 이후 그의 작품은 수백 곡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클라리넷을 공부하여 20세에 그의 스승 엔리케 부에노(Enrique Bueno)가 이끄는 산티아고 시립악단(Municipal Band of Santiago)의 클라리넷 주자가 되기도 하였다.


콤파이가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번째 D현을 두 줄로 만듦으로써 기타와 쿠바 트레스(Cuban tres)의 특징을 절묘하게 혼합한 7현 악기 아르모니코(armonico)를 발명하기도 했다. 트릴리나(trilina)라고도 알려져 있는 이 악기를 그는 오늘날에도 연주하고 있다. "나는 더 많은 하모니를 찾고 싶었습니다. 트레스로는 부족했어요."라고 그는 설명한다.


콤파이는 1929년에 처음 하바나를 방문했는데 1934년에 니코 사키토의 '퀸테토 쿠반 스타(Quinteto Cuban Stars)'와 연주를 한 뒤로 이곳으로 이주했다. 사키토의 밴드는 공연 후에 하바나를 떠났으나 콤 파이는 남아 하바나 시립악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38년, 그는 '후스타 가르시아스 콰르테토 아투에이(Justa Garcia's Cuarteto Hatuey)'의 일원이 되어 멕시코에 다녀오기도 했다.


다음해에 하바나로 돌아온 그는 '콘훈토 마타마로스(Conjunto Matamaros)'에 입단하여 12년간 클라리넷 주자로 활동했다. 때를 같이 하여 그의 연주경력에 가장 빛나는 성공으로 기록될 모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거의 우연에 가깝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1942년의 어느날, 콤 파이는 로렌조 이에레수엘로(Lorenzo Hierrezuelo)의 머리를 이발해주던 중 뜻이 맞아 듀오를 결성하고 스스로를 '동지들'이라는 뜻의 '로스 콤파드레스(Los Compadres)'라 이름하였다. 콤파이에게 있어 이에레수엘로와 활동한 13년간은 "생애 최고의 시기"였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말로 하지 못하는 매우 단순한 것들을 음악에 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음악 속의 시와 자연을 감상했지요. 우리가 만든 것은 결코 의미 없는 소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즈음에 그는 콤파이 세군도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콤파이'는 동지라는 뜻의 '콤파드레'의 줄임말이고 '세군도'는 베이스 화음을 잘 소화해내는 그의 낮은 목소리(bass harmony second voice의 'second'를 따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1956년에 콤파이 세군도는 그의 이름을 딴 '꼼빠이 세군도와 친구들(Compay Segundo y sus Muchachos)'을 결성한다. 트리오로 출발한 이들은 후에 4인조 그룹이 되었다. 수없이 멤버들을 교체하면서 콤 파이는 이 그룹의 명맥을 오늘날까지 유지해왔다. 그의 아들 살바도르(Salvador)는 이 그룹의 더블베이스를 맡고 있다. 콤 파이는 1996년 이스트 웨스트 음반사(East West Records)와 계약을 맺고 [요 벵고 아키]를 녹음했고, 안톨로지아(Antologia)라는 제목의 더블 CD 앨범을 내기도 했다.
라이 쿠더(Ry Cooder)는 콤파이 세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내린 신의 계시이자 영감의 근원이며 음악의 발원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훌륭한 음악가가 없었다."

 Omara Portuondo 1930년 출생 

이 음반의 홍일점인 오마라는 쿠바 음악의 꽃이자 최고의 볼레로 가수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녀는 '콰르토 데 올란도 델 라 로사(Cuarto de Orlando de la Rosa)'와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전원 여성그룹인 '아나카오나(Anacaona)'에서 활동했다.
1952년 그녀는 '아이다 디에스트로 콰르텟(Aida Diestro Quartet)'의 멤버가 되어 그 후 15년간 그들과 함께했다. 그15년이라는 세월동안 오마라는 자신의 솔로 연주 경력을 쌓았고 현재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세계 각지를 방문하여 공연한 바 있는 오마라는 냇 킹 콜(Nat King Cole)과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와 함께 노래하기도 했다.

 Manuel 'Guajiro' Mirabal 1933년 출생 


아버지의 무릎에서 트럼펫을 배운 미라발은 1951년이 되어서야 전문연주자의 길에 입문했다. 그는 1953년 '스윙 카시노(Swing Casino)'라는 재즈 밴드에 들어간 지 3년 뒤에 '룸바바나 그룹(Conjunto Rumbavana)'을 결성했고, 다시 1960년에는 '리버사이드 오르케스타(Orquesta Riverside)'에 입단했다.
'구아히로' 미라발이라는 별명은 '리버사이드 오르꾸에스따'의 보컬이었던 티토 고메스(Tito Gomez)가 준 것이다. 그 후에도 미라발은 여러 그룹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아르만도 라메르(Armando Ramer)가 지휘하는 '오르케스타 델 카바레 트로피카나(Orquesta del Cabaret Tropicana)', 레오나르도 티모르(Leonardo Timor)가 지휘했고 하바나의 국립호텔에서 공연했던 '오르케스타 카시노 파리시엔(Orquesta Casino Parisien)', 그리고 쿠바 국립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의 공식 오케스트라인 '오르케스타 델 ICRT(Orquesta del ICRT)'가 모두 미라발이 몸담았던 그룹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스카르 데 레온(Oscar de Leon)과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와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Manuel Licea 'Puntillita' 1927년 출생 


푼틸리타'는 일곱 살에 노래를 시작해서 1941년에 '오케스트라 리세오(Orchestra Liceo)'에 입단했다. 1950년대에는 아돌포 구스만(Adolfo Guzman), 로베르토 파스(Roberto Faz), 카스카리토(Cascarito) 등을 포함한 하바나의 명성있는 밴드의 리드 보컬로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는 또한 셀리아 크루즈(Celia Cruz)와 함께 노래한 적이 있으며 그 후 거의 70년간을 활동해온 전설적인 그룹 '소노라 마탄세라(Sonora Matancera)'와 노래하기도 했다. '푼틸리타'는 '소노라 마탄세라'와 히트곡인 [수탉과 암탉 그리고 말(The Rooster, The Hen and The Horse)]을 취입했다. 그의 세련된 보컬 스타일은 쿠바 음악의 다양한 리듬을 자유자재로 소화해왔는데 그 중에서도 쏜(son)과 볼레로가 그의 주특기이다.

 Orlando Ropez Vergara 'Cachaito' 1933년 출생 


로페스 가는 훌륭한 베이스 주자들을 배출한 가문으로 쿠바에는 널리 알려져 있다.
카차이토의 아버지 오레스테스(Orestes)와 숙부 이스라엘은 그들의 아버지이자 카차이토의 조부인 페드로(Pedro)로부터 베이스를 배워 훌륭한 연주자가 되었다.
1930년대에 오레스테스와 이스라엘 로페스는 베이스 연주의 교과서를 다시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활동을 했다. 오레스테스는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와 함께 맘보 리듬을 개발하는데 기여했고, '카차오'로 알려진 이스라엘은 데스카르가(descarga)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의 카차이토는 바이올린 연주도 심심찮게 했으나 결국엔 베이스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카차이토가 가장 처음으로 끌린 악기는 단손(danzon)이었는데 이미 12세에 당시 댄스음악을 하는 밴드로서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오르케스타 리버사이드'와 연주했을 정도로 실력이 대단했다.
한번은 숙부의 권유로 1930년대부터 활동해오던 '아르카나 이 수스 마라빌야스 (Arcana y sus Maravillas)'와 연주했다가 이 나이 어린 음악가의 선율에 매료된 밴드로부터 아예 멤버로 들어올 것을 제안받기도 했다.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한 음악적 재능을 발휘했던 카차이토는 1960년대에 이르러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Orquesta Sinfonica Nacional)'와 함께 클래식 음악의 연주를 시작했다. 초저녁에는 콘서트 홀에서 베토벤을 연주하고 밤이 깊어지면 클럽에서 전자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선호한 악기는 어쿠스틱 베이스였으며 찰리 밍구스(Charlie Mingus)의 영향으로 재즈음악을 매우 사랑했다. 뿐만 아니라 그 즈음의 카차이토는 이라케레(Irakere)와 함께 연주하면서 모던 라틴 재즈를 발전시키는데 일조했다. 지금도 그는 쿠바 음악, 클래식, 재즈의 세 음악 장르를 같은 열정을 가지고 연주하고 있다.

 Pio Leyva 1917년 출생 


레이바는 '쿠바의 엘 몬투네로(El Montunero de Cuba')로 알려질 만큼 유명한 작곡가로 그의 곡 중에는 쿠바 음악의 스탠다드로 꼽히는 작품이 여럿 있다.
6세에 봉고 연주대회에서 입상하였으며 1932년에 가수로서 데뷔하였다.
깊고 토속적인 목소리를 가진 피오는 1950년에 RCA Victor사와 첫 계약을 맺은 후로 25개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즉흥연주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피오와 함께 공연한 밴드로는 위대한 베니 모레(Benny More), 베보 발데스(Bebo Valdez)와 노로 모랄레스(Noro Morales)가 있으며, 한때 '콤파이 세군도와 친구들'의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다.

            
대통령 궁에 쿠바 혁명군의 공격이 개시된 1953년의 어느 날, 피오는 '콤파이 세군도와 친구들'과 녹음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앨범에서 바깥의 총성을 들을 수 있다고 피오는 맹세코 주장한다. 1991년에 피오는 서 아프리카에서 순회공연을 가지며 74년의 청춘을 자랑했다. 서 아프리카에는 피오를 신봉하는 열광적인 팬들이 있다.

 Delgado 1956년 출생 


바르바리토는 쿠바 최고의 라우드(laud 또는 라우디스타)
주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개의 현으로 소리를 내는 라우드는 작고 류트(lute)와 유사한 악기이다.
바르바리토(Barbarito) 14세부터 다양한 밴드와 전문 라우드 주자로서 연주했는데 이중에는
'캄포 알레그레(Campo Alegre)'와의 공연에서는 위대한 셀리나 곤살레스(Celina Gonzalez)의 곁에 서는 영광을 안았다. 실제로 바르바리토는 쿠바 음악의 대가의 반열에 드는 사람들과는 거의 모두와 함께 연주한 경험이 있다.

 작곡가 겸 기타리스트인 레오 브라워(Leo Brouwer),
 피아니스트 파포 루카(Papo Lucca),
 베네수엘라 출신의 살사 가수 오스카 드 레온(Oscar d'Leon)

등 그와 연주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한편, 바르바리토는 음악 강사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Buena Vista Social Club - Amor De Loca Juventud





  Buena Vista Social Club - Dos Gardenias





■ Buena Vista Social Club / La Bayamesa
(브에나 비스타 소시얼 클럽 / 라 바야메싸)
from BVSC (1997)

쿠바음악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없던 사람들에게 쿠바음악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사람들이 바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죠.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도입니다. 빔 벤더스의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소개되면서 더 관심을 모으게 되는데요. 7년이 지난 지금, 이미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콤파이 세군도, 루벤 곤잘레스 등이 세상을 떠났구요. 그 가운데 최고령자였던 콤파이 세군도는 지난 2003년 7월 12일 쿠바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 Compay Segundo / Saludo a Chango
(콤파이 세군도 / 챵고 신에게 축배를)
from Calle Salud(1999)

■ Omara Portuondo / Veinte Anos
(오마라 포르투온도 / 20년)
from BVSC presents Omara Portuondo (2000)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1997년에 처음 음반이 발표되면서 세계적으로 히트를 했는데요. 빔 벤더스 감독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멤버들이 그 후 1년 사이에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이 점이 궁금해서 1998년도에 영화를 만들게 됩니다. 이들의 연주장면이나 인터뷰를 모아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것이 바로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도 중후반부터 소개가 되면서 영화, 셀프 타이틀 음반, 이런 것들이 뒤죽박죽이 됩니다. 영화보다 1년전에 소개됐던 음반이 졸지에 영화음악 사운드트랙으로 둔갑을 하기도 하구요. 이런 혼돈이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여타 쿠바 음악 아티스트들의
음반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또 음반 산업의 하향세와 더불어서 쿠바음악도 다시 외면당하고 있죠.

■ Ibrahim Ferrer / Fuiste Cruel
(이브라임 페레르 / 당신은 잔인해요)
from Buenos Hermanos (2003)

■ Ry Cooder & Manuel Galban / Dru me Negrita
(라이 쿠더 & 마누엘 갈반 / 드루 메 네그리타)
from Mambo Sinuendo (2002)

쿠바 음악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중심으로 인식되어져 왔죠. 그러나 이들에게 계속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면서 우리가 아는 쿠바 음악의 범위는 점점 제한되는 셈이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 대한 주목과 비교해서 우리가 과소평가를 하고 있던 또 하나의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바로 '아프로 쿠반 올 스타즈'입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멤버들도 대부분 이 아프로 쿠반 올 스타즈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첫 음반 A Toda Cuba le Gusta 이후, 두번째 음반까지 발표가 됐습니다. 이 두 장 모두 쿠바 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음반으로 평가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데뷔 음반에 참가했던 아티스트들을 기준으로 생각을 합니다.

아프로 쿠반 올스타즈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후안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의 역량이 모두 드러나는 명반인데요. A Toda Cuba le Gusta 가운데서 타이틀 곡 들으시겠습니다.

■ Afro Cuban All Stars / A Toda Cuba le Gusta
(아프로 쿠반 올스타즈 / 쿠바 향취의 모든 것)
from A Toda Cuba le Gusta (1997)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실질적인 음악감독인 후안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가 따로 조직을 했던 아프로 쿠반 올 스타즈의 음악 소개해 드렸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든 쿠바음악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부흥시켰지만, 또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쿠바 음악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또 외국에서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인기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들도 많구요. 라틴 음악에 정통한 사람들은 과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그 정도로 대우를 받을 음악성을 가지고 있느냐 의문을 갖는 것이죠.

그렇다면 정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가진, 이들이 남들보다 주목받을만한 정말 중요한 요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드라마입니다. 이들을 결코 쿠바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생을 살만큼 산 음악밖에 몰랐던 노인들이 남은 여생을 노래로 채우고 싶어하는 것뿐입니다.

영화 첫장면 보시면, 이브라임 페레르와 오마라 포르투온도가 Silencio를 노래하는 스튜디오 녹음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오마라 포르투온도의 모습을 사람들은 잊지 못하는데요. 바로 이런 모습들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세계 각지에서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겠죠.

■ Ibrahim Ferrer & Omara Portuondo / Silencio
(이브라임 페레르 & 오마라 포르투온도 / 정숙!)
from Ibrahim Ferrer (1999)





출처 : 황우창의 월드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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