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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h Piaf

E 조회 수 1974 추천 수 0 2005.09.21 15:21:16


프랑스의 빌리 할러데이로 추앙되는 에디뜨 삐아프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꿋꿋한 삶을 살면서 그 역경을 노래에 담았다. '삐아프('참새'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작은 키에 가녀린 몸으로 청중을 휘어잡는 감정어린 목소리는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그를 닮은 많은 후대 가수들을 만들어냈다.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 본명: Edith Giovanna Gassion)는 1915년 12월 19일 파리의 베르빌에서 태어났다. 서커스 단원이던 아버지와 카페에서 노래했던 어머니는 그녀를 낳자마자 그녀를 거리에 내버렸다. 숱한 고생으로 6살에 잠시 시력을 잃기도 했었던 그녀는 거리에서 노래부르며 동냥으로 목숨을 유지했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노래하던 그녀는 10살때부터 직업적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가던 그녀는 16살에 한 군인과 관계를 갖고 첫 딸 Marcelle을 출산했지만 아이는 2년 후 수막염으로 사망했다.

1935년, 프랑스의 작은 술집 'Gerny'의 주인이었던 루이 루프레(Louis Leplee)가 길에서 노래하는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 보고 당시 20살이던 그녀를 가게에 데려와 노래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온갖 풍파에 시달린 삶이 배어나는 그녀의 노래 실력은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La Mome Piaf'('The Kid Sparrow-작은 참새'라는 뜻)로 불리는 열정적인 가수로 알려지기 시작, 그 범위를 넓혀갔다. 작곡가 레이몽 아소(Ramond Asso)와 모리스 슈바리에(Maurice Chevalier)의 도움으로 그녀의 삶이 다듬어진 노래로 표현되면서 거칠고 굴곡 많은 그녀의 인생이 예술로 승화되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뇌에 찬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서서히 샹송계의 스타가 돼 갔다. 1936년 그녀는 성이었던 'Gassion'을 없애고 'Piaf'라는 이름을 사용, Edith Piaf로 주변국가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를 발굴해 키워준 Louis Leplee가 살해되면서 Piaf는 잠시 시련에 빠졌다. 2차 세계 대전(1939~1945) 즈음에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활동 영역을 미국 대륙으로 넓혔다. 1946년 워싱턴에서 미국 첫 투어공연을 성황리에 치루면서 그녀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노래했다. 이런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는 미국에서 만난 권투선수 마셀 셀당(Marcel Cerdan). 1948년 이들은 결혼했고 그녀는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됐으며 진실한 사랑을 체험했다. 하지만 Cerdan은 이듬해 그녀를 뒤로한 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떴다. 1950년 그녀는 너무나 사랑했던 그에게 바치는 곡 '사랑의 찬가(L'Hymne A L'amour)'를 만들었고, 이 애절한 러브송은 그녀가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가수라는 평을 들을 만큼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로 세계인의 감성을 자극했다. (이 곡은 이후 몇 장의 앨범에 영어로 실리기도 했으며,우리 나라의 음악 교과서에 실릴만큼 유명한 곡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 때문에 크게 상심한 그녀는 술과 마약을 도피처로 삼기 시작했다.

이후 Piaf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됐지만 그녀는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1952년 가수이자 작곡가 인 자끄 필스(Jacques Pills)와 결혼, 자손을 기원하며 'Je T'ai Dans La Peau'를 부르기도 했고, 1953년 '하룻밤의 연인(Les Amants D'un Jour)'과 '오토바이를 탄 남자(L'Homme A La Moto)'를 녹음했다. 이듬해에는 미국을 11개월 동안 돌면서 장기 투어를 가졌고, 워싱턴과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도 공연을 했다.

게다가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 'Les Amants De Demain'(1956), 'Paris Chante Toujours', 'La Petit Lili' 등에 모습을 비추기도 했다. 1959년 친분이 있던 작곡가 조르쥬 무스타키(Georges Moustaki)에게서 받은 '주인님(Milord)'이 영국에 이어 이탈리아, 독일, 네델란드에도 알려지게 되면서 더 많은 투어공연이 연이었다. 또 1960년에는 작곡가이자 친구였던 찰스 드몽(Charles Dumont)의 곡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 그리고 그녀의 자작곡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으로 대성공을 거두면서 '샹송계의 대모'로서의 그녀 이름을 후세인에게 널리 각인시켰다(이 곡은 영화 파니핑크에 삽입된 곡이기도 하다.). 1962년 그녀는 20살 이상 연하인 테오 사라포(Theo Sarapo)와 결혼했다. 그는 그녀에게 마지막까지 일하는 활력을 줬으며, 그녀는 그에 대한 사랑을 'A Quoi Ca Sert L'Amour'로 표현하기도 했다.

항상 관중들을 전율하게끔 하며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갔던 Edith. 1963년 그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노래할 때 항상 검은 드레스를 입던 작은 체구의 그녀는 이브 몽땅, 죠르쥬 무스타키, 주디 갈란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의 유명한 보컬리스트를 만들어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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