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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in Music

조회 수 4647 추천 수 0 2005.10.19 19:46:51



1. 라틴 아메리카 대중 음악의 형성

라틴 아메리카 대중 음악의 대표적인 장르는 노래(Canción)이다.
노래는 처음에 스페인 상선을 통해 신대륙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상류층의 음악은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음악이 유행하였으며, 하류층은 부로 안달루시아 출신 이주민의 영향으로 세기디야(Saguidilla)라는 캐스터네츠와 기타 반주의 강렬하고 정열적인 무곡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배가 출발했을 당시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요소들이 함께 용해되어 남미 고유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노래를 형성한 중요한 요인을 찾으면,
1) 스페인·포르투갈에서 온 유럽의 민속 음악


2) 스페인 침략에 반항했던 인디오의 음악


3) 아프리카로부터 들어온 흑인들의 음악


4) 1950년대 이후 미국·유럽의 대중 음악



이렇게 네 가지 요인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미국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고유의 아프리카 악기-특히 타악기-를 금지하고 서로간의 결혼을 금기로 삼았던 반면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 음악, 인디오 음악, 흑인 음악이 하나로 용해되어 새로운 혼합 형태의 음악을 만들어 냈다.
인디오들이 그들의 순수한 혈통과 고유한 음악을 보존하고 있는 곳은 안데스 고원의 몇 지역밖에 없다. 이들은 거의가 생존을 위하여 도회지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회지에서 노동자 계층을 형성하고 빈민가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여기서 새로운 형태의 라틴 아메리카 음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2. 새로운 노래


'새로운 노래(Nueva Canción)'라는 말은 1960년대 말 라틴 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생겼으며 원래는 칠레에서 열린 '제 1회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이라는 행사의 이름으로 붙여졌던 것이 점점 그 범위가 넓어져 남미 전역에 걸쳐 일어났던 1970년대의 민족운동을 가리키게 되었다.
새로운 노래는 각기 다른 나라에서 그들의 전통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을 가졌다.
아르헨티나의 '누에보 칸시오네로 아르헨티노(Nuevo Cancionero Argentino)',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 쿠바나(Nueva Trova Cubana)-신음유시', 브라질의 '노바 뮤지카 포퓰라 브라질레이라(Nova Musica Popular Brasileira-약자로 NMPB)'가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보통 '누에바 칸시온'이라는 말로 통용이 가능하다. 칠레 외에도 멕시코,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푸에르토리코, 베네수엘라,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에서도 이 표현을 사용한다.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에 시작된 이 운동은 대중 음악 내에서의 한 경향으로 나타났다.
대중 음악이 시장 법칙에 의한 교환가치 또는 하나의 예술적 상품의 위치로 전락해 버림에 따라, 노래가 점점 대중과는 무관한 소비재 상품이 되었고 미국·유럽에서 들어온 외국의 유행 음악이 방송 매체를 등에 업고 대중 음악을 질식시켜 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음악, 새로운 노래를 만들려는 운동을 점점 가속화시켰으며, 기존의 대중 음악과 이러한 노선 사이의 구분을 더욱 뚜렷이 해 주었다. 이러한 상황이 주는 위협에 대한 민중적 저항이 이 새로운 노래에 담겨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민속 음악과 대중 음악 사이의 경계가 흐린 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탱고(Tango), 쿠바의 손(Son), 멕시코의 란체라(Ranchera), 브라질의 삼바(Samba)를 기초로 한 대중 음악이 크게 유행했다. 새로운 노래 운동도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남미 전역에 대륙적 규모로 확산되었다.
1950년대 이후의 새로운 노래 운동은 도회지의 중산층과 젊은 대학생 집단에서 강력한 지지 세력을 얻어 사회 저항 운동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 특징이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운동이 민속의 연구·수집 작업에서 출발하여 민속 회복 운동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에서 새로운 노래 운동은 라틴 아메리카 고유 전통과의 연결선 상에 자리잡으려 하였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전체의 동질성과 관련이 있다면 국가·민족의 장벽을 무시하면서 이웃나라들의 음악 운동 경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러한 반응이 자발성을 해치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일종의 경향 또는 지향점이라는 사실,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영향도 자체 내에서의 기존의 지지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능동적인 수용이 가능했다는 사실이었다.

3. 아르헨티나의 노래 운동


1950년대에 들어와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빈민가에서 나온 대중 음악으로부터 새로운 노래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상황은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격동기였다.
1955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5월 광장(Plaza de Mayo) 대학살. 페론 정부 실각.


1959년 바티스타 정부의 전복. 쿠바 혁명.


1964년 주앙 굴라르트(João Goulart) 정부의 전복(브라질). 강경 노선의 지속(15년간)칠레 기독교 민주당 집권.


1967년 체 게바라, 볼리비아 산중에서 전사.


1968년 베네수엘라, 중미에서 게릴라전 고조. 멕시코 틀라텔로코(Tlateloco) 대학살


1970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통일인민당(Unidad Popular) 집권.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내각의 3년 지속.


1973년 우루과이 군정 시작. 칠레의 통일 인민당 실각(쿠데타). 제 3차 페론 정권

이러한 격동기 속에서도 아르헨티나는 당시 집권한 페론 정부에 의해 전에 누리지 못했던 경제적 부를 누리게 되어 남미 최고의 부국이 되었다. 낙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이 나타났으며, 지방에서 살던 원주민들도 이틈에 끼여 그들의 전통적 악기와 노래를 가지고 들어와 노동자 계층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새로운 노래 운동은 페론 정부가 실시한 민속·대중 문화 보호 정책의 힘을 입어 급속도로 파급되었다. 페론은 라디오 방송에서 의무적으로 2 분의 1은 민속·대중 음악을 방송해야 한다는 법령을 만들었다. 제 1기라 할 수 있는 1950년대의 경향은 주로 전통적인 것이어서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때의 대표적 가수는 산 오라시오(San Horacio) 출신의 안토니오 토르모(Antonio Tormo)였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에 나타난 많은 가수와 그룹들은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만들어 내었다.
오랫동안 이 운동을 주도했던 로스 찬찰레로스(Los Chanchaleros), 로스 프론테리소스(Los Fronterizos)그룹, 오라시오 과라니 (Horacio Guarani) 등의 작곡가가 배출되었다. 특히 이 운동의 선구자로 인식되는 아타우알파 유팡키(Atahualpa Yupanqui)의 활동은 중요했다.

그는 인디오 출신으로, 고향의 가우초(gaucho)들이 부르던 민요 빠야다(payada)를 계승, 대중화한 인물이었다.
화려한 연주 기술을 바탕으로 작곡과 연주에 있어서 새로운 경향의 기반을 닦아 놓았을 뿐만 아니라 남미의 고유한 노래를 발전시키는데 새로운 길을 열었으며 진보된 기타의 연주 기술과, 인디오 음악의 서정성과 표현력을 결합시키는데 힘썼다. 그가 바이올린과 기타를 공부했다는 사실은 그의 노래 속에 라틴 아메리카의 고급 문화, 대중 문화, 민속 문화가 모두 반영되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음유시의 아버지로 불렸다.
누에보 칸시오네로 아르헨티노는 시인 아르만도 테하다 고메스 (Armando Tejada Gómez)의 '선언문 (Manifesto)'이 발표된 1958년부터 하나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에는 작곡가 오스카르 마타스(Oscar Matas),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 (Mercedes Sosa), 티토 프란시아(Tito Francia) 등이 가담했다. 중요한 연주자는 차랑고(Charango)연주자인 이아이메 토레스(Iaime Torres), 인디오 피리 연주자인 우냐 라모스 (Uña Ramos)였다.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노래는 기본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음악 형식이나 주제에서도 변혁을 가져왔다.
초기의 운동에서 나타난 시골 풍의 노래는 아르헨티나의 민족적 상황과 경험으로부터 내용을 가져온 섬세한 시로 바꾸어졌으며, 수많은 그룹과 가수들이 나와서 새로운 화성·연주·편곡 방식을 도입했다. 이들 노래가 다루는 주제는 점점 일반적인, 즉 사회 상황에 관한 것으로 기울어지고 그 가사는 점점 세련되어져 도회지의 시에 가깝게 되며 농민이나 인디오의 표현 방식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던 시인들과 민요 작곡가들이 손을 잡고 이 운동에 대거 참여한 데에도 그 이유가 있다.
제 2차 페론 내각의 1976년 실각 이후, 포클랜드 전쟁 시기까지 집권한 군사 정권이 들어설 때부터 아르헨티나의 노래 운동은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다. 라디오·TV 프로그램에서의 선별 정책 실시와 아르헨티나 국가 전체의 경제 문제, 음악가들의 개인적 신변 위협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음악가들은 해외로 떠나거나 남아 있는 사람들도 그 활동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상당한 가능성과 새로운 방향 모색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4. 칠레의 노래 운동



칠레의 노래 운동인 누에바 칸시온 칠레라(Nueva canción chilera)의 초기 단계(1960년 대 초)에서는 민속에 대한 연구·보급이 주요 활동이었다.
마르고트 로욜라(Margot Loyola) 와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 엑토르 파바스(Héctor Pavaz) 부부, 가브리엘라 피사로 (Gabriela Pizzaro)는 상당한 양의 노래, 시, 전설, 춤을 칠레의 변방과 인디오 거주지에서 채집하였다. 이들의 작업은 그들의 뿌리를 생각하게 해주었으며 고유문화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의식을 심어 주었다.



파라는 칠레의 평원과 산악 지역을 횡단하면서 거기서 흡수한 지식과 대중 예술을 바탕으로 자신의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남미 전역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칠레의 노래에 가장 근본적인 영향을 주었다.

칠레의 노래 운동은 민중 봉기 사건과 그 때를 같이해 일어났다.
극장과 노래들은 처음부터 칠레의 노동자 투쟁과 관련되었다. 따라서 노래가 1960년대의 정치·사회 운동과 가장 밀착된 문화적 요인, 궁극에 가서는 이 나라의 삶에 대한 참된 표현이 된 것은 당연했다.



새로운 노래 운동은 점점 넓은 폭의 청중에게 그 영향을 뻗쳐 갔다.
이 노래 운동은 그 발생 초기부터 격렬한 사회 저항과 관련되어 매우 정치성을 띠었기 때문에 통일 인민당 정권에서 가장 활발했다. 이때에 최고의 성수기를 맞이한 칠레의 노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집단 조직 형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운동은 종전의 대중 음악의 보급 경로였던 TV와 라디오에 노골적으로 반대였기 때문에 전파 계층을 노동자·농민·학생(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 구성하기도 했으며, 아옌데 정권의 등장 이후 대중 매체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의 몰락과 함께 파라가 가장 신임하던 빅토르 하라(Victor Jara)는 칠레의 노래 운동에 있어 첫 순교자가 되었다. 그는 혁명성, 참여성이 짙은 노래를 발표했으며, 군부 쿠데타 기간이었던 1973년 9월 15일 살해당했다.
훌륭한 기타 연주자, 시인, 작곡가. 연극배우였던 그는 음악에서 보여준 주제나 다양한 음악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민중과의 풍부한 교감을 통한 리얼리티를 전달하고 있었다. 칠레에서 나타난 음악 창작 운동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경향 가운데 하나는, 대중 지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보다 세련된 표현 형태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의 고전 음악 형식을 따르게 되어 대중 음악 전 영역에 걸친 곡목이 도입되었다. 이들 작품들은 대중 형식과 고급 형식의 중간선 상에 위치했다.

1970년대 이전 칠레의 새로운 노래는 상당히 예술적 가치가 담긴 작품을 만들어 내었고,
그 주도 세력들은 노동 조합 등이 조직한 수천 회의 연주회를 통해 인기를 끌었다. 칠레가 겪어 온 역사적 상황을 솔직하게 반영한 이들 노래는 이러한 사회적 대립과의 밀접한 연관성 때문에 군사 정권 초기에 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노래 운동에 있어서 침체기가 있었으나 오래 가지 않았다.
정권 교체 당시 외국으로 건너갔던 예술가들이 그들을 받아들인 나라에서 작업을 계속했고 국내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곧 새로운 상황에 대처, 1975년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국내에서의 노래 운동은 계속 위협을 받았는데, 이는 직접적인 수단을 통한 압박보다는 정부나 기관에서 지원을 중지함으로써 매스컴을 통해 전파되던 외국의 유행 음악과 공평하지 못한 경쟁을 벌여야 했음을 뜻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해외에서의 칠레 노래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어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다.

새로운 노래 운동은, 고유성 고수에 있어서 나타나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중 예술의 상업화라는 점에서 볼 때 고유성 고수와 동시에 대중 전달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경로를 개발해 왔다. 옛 것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도 고유의 보급 경로를 만드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노래 운동은 민속 음악과 대중 음악의 매개체 역할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5. 쿠바의 신음유시 운동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교차점에 위치한 쿠바는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유럽의 문화가 아프리카로 유입될 때 가장 먼저 발을 디디는 전진 기지였다.
한편 16세기 이후 쿠바에 대대적인 사탕수수 농장이 건설되었을 때, 모자라는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1,000,000명 이상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유입되었다. 그 영향으로 현재 쿠바의 인구는 흑백 혼혈 인종인 물라토(mulato)가 60%, 스페인 계 백인이 25%, 흑인이 15%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많은 중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도 유입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쿠바 음악은 스페인 음악과 아프리카 음악의 혼합된 산물이었다.
특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의 플라멩코(flamenco) 음악이 아프리카 음악의 리듬과 섞이면서 전형적인 쿠바 음악이 태어나게 되었다.

1889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의 미국의 승리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다.
이로 인하여 미국의 대중 음악이 침투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쿠바 음악과 뒤섞여 역사상으로 매우 독특한 혼합적인 음악이 태어났다. 유럽 음악의 영향을 받아 유러-큐반 음악인 아바네라(havanera)가 탄생했으며, 아프리카 음악의 영향을 받아 아프로-큐반 음악인 룸바(lumba), 맘보(mambo), 차차(chacha)가 성행했으며, 카리브 토착의 민속 음악이 필링(feeling)과 손(son) 등을 만들었다.
19세기에 민속 음악을 집대성한 마누엘 사우멜(Manuel saumell), 이그나시오 세르반테스(Ignacio Cervantes), 호세 우르페(José Urfé)등에 의해 쿠바 음악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어 20세기 초반이 되자 기타 반주에 의해 노래를 부르는 음유 시인들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20세기 초 민요 운동의 선구자들로는 페페 산체스(Pepe Sánchez), 신도 가라이(Sindo Garay), 마누엘 코로나(Manuel Corona), 알베르토 비야론(Alberto Villalón), 로센도 루이스(Rosendo Ruiz), 아르세니오(Arcenio)가 있다. 그 이후 등장한 제 2기의 활동은 트로바 소노라(Trova Sonora)로 알려졌으며 이그나시오 피네이로(Ignacio Pineiro), 미겔 마타모로스(Miguel Matamoros)가 이끄는 3인조 그룹이 대표적이었다.
음유시는 독창자와 기악 앙상블로 구성된 그룹으로 독창자가 노래할 때 나머지는 반주를 하거나 각자 특징적인 악기, 가령 작은 기타의 일종인 트레스(Tres), 기타, 마라카(Maraca)를 연주하면서 함께 노래한다.
이 시기의 대중가요에 큰 변혁을 일으킨 것은 19세기 문학의 낭만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은 시의 우수성이었다.
손이 1930년 대 초에 도입된 라디오 덕택으로 많은 청중을 얻게 된 것은 신음유시 운동의 제2기부터였다.
당시 가장 중요한 그룹은 손의 구조와 형식을 만든 마타모로스(Matamoros) 3인조였다. 이제 손은 쿠바 음악의 민족적 성격을 결정짓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쿠바 음악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경향은, 낭만주의의 전통에 기포하고,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블루스의 영향을 받은 필링으로 1940년대 말, 호세 안토니오 멘데스(José Antonio Mendez), 세사르 포르티요 델 라 루스(Césarr Portillo de la Luz), 타니아 카스테야노스(Tania Castellanos) 등을 통해 신음유시 운동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필링은 기타 반주 하나만으로 노래되었으며, 당시 라디오 방송을 타던 밴드나 오케스트라 반주 음악에 밀려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쿠바 내의 풍부한 음악적 전통을 이어 받고, 50-60년대의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노래 운동의 영향에 의해 쿠바의 신음유시가 탄생했다. 신음유시의 탄생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요소는 쿠바 혁명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에 있어서 쿠바 혁명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남미 전역에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사회적 격변-게릴라전의 발발, 극단적인 좌경화, 학생·노동 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영향, 미국의 대 라틴 아메리카 강경 정책의 시작-을 몰고 왔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파급 효과도 대단했다. 이 사건은 라틴 아메리카에 유례없는 단결을 가져다주었으며, 그 민족주의 정신의 물결은 남미 전역을 휩쓸어 지식인·예술가 집단에서 강력한 호응을 얻어 새로운 문화적 공간의 창출에 큰 역할을 했다. 가령 문학사상 최초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민족주의와 혼합의 양상에서 나타나는 끄리오요(Criollo)문화를 지향하는 운동이 민족 문화라는 좁은 개념을 내포하였지만 대륙 전체의 일체감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역주의의 형태를 띠면서 세련된 모습으로 되었다.
혁명 이후 쿠바 정부는 마침내 이러한 문학적 성공을 스페인 어 사용권에 보급하려는 창구로서 아메리카의 집(Casa de las Américas)을 설립했다. 이 기관은 문학, 미술, 음악, 출판, 연극 등 제반 문화 활동을 지원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결속을 위한 정신적 토대 마련을 시도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 보급에 있어서 아메리카의 집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의 쿠바 고립화 정책에 맞서 쿠바와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문화 기관을 연결하는 교량이었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초청하여 창작 활동을 하도록 지원함으로써, 오히려 라틴 아메리카 문화 활동의 메카로 떠오르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신음유시의 탄생은 이러한 문화적 상황의 산물이기도 했으며, 1960년대 중반에 이 섬에 상륙한 남미의 음악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신음유시는 그 주요 내용이 조국과 사랑에 관한 것이며, 여기에 혁명과 혁명 영웅의 찬양, 저항의 노래가 첨가되고 그것이 태어난 극적인 상황과 뚜렷한 시적·음악적 서정성이 잘 결합되어 매우 다양한 음향과 정서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내에서 신음유시 운동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를 끼친 사람은 쿠바 혁명의 음악적 대표자로 꼽히는 민중 시인 카를로스 푸에블라(Carlos Puebla)가 두각을 나타냈다.
이 민중 시인은 그가 이끄는 그룹인 로스 트라디시오날레스(Los Tradicionales)와 함께 쿠바 혁명을 포함한 남미의 최근의 역사·정치적 사건의 연대기를 노래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쿠바의 노래뿐만 아니라 신음유시 내에서 정치적 참여성이 가장 강한 경향, 즉 시사적 노래(Canción Contingente)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길을 터놓았다. 그의 작품은 정치성을 띨 뿐만 아니라 민중적 매체로서의 시적 성격을 통해 쿠바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비할 데 없는 신비성과 관련시키면서 민중적 삶을 이야기해 주었다.
푸에블라는 손, 과라차, 과히라 등 쿠바의 전통 음악 형식을 이용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노래가 쉬우면서 대중적 수용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토양을 바탕으로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민중에게 전달할 가장 효과적인 매체로 음유시 형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들은 혁명 후 새롭게 건설되는 인간적 삶에 대한 믿음을 합창했고, 민중은 그들을 자신들의 대변자로 믿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위협 아래 있었던 쿠바의 시대 상황과 강렬한 시적, 음악적 서정성이 잘 결합되어 음유시는 쿠바 전역에서 사랑 받는 음악이 되었다. 당시 쿠바 문단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파야드 하미스(Fayad Jamís)와 로베르토 페르난데스 레타마르(Roberto Fernández Retamar)가 음유시를 짓기 시작했고, 하미스는 자신이 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직접 불렀던 사실은 당시 쿠바에 있어서 음유시가 갖는 의미를 잘 보여주었다.
1966년 젊은 예술인들이 모여 미국을 풍자해 붙인 이름의 월간지 <수염난 악어>를 창간했다. 이 잡지의 창간사에서 그들은 시와 음악의 만남을 추구한다는 것을 선언했다. 이후 이 잡지는 쿠바 신음유시 운동 이론의 산실이 되었다.
쿠바 정부의 예술 지원 정책으로 아바나에 영화 예술 및 영화 산업 연구소(Instituto Cubano de Arte e Industrias Cinematográficas: ICAIC)가 세워졌으며, 각지에서 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했다.
이 연구소와 월간지 수염난 악어를 축으로 모인 젊은 예술가들은 1967년 아바나의 예술극장에서 테레시타 페르난데스의 노래에 맞춰 시를 낭송하는 시와 음악의 만남 공연을 기획했다.
그날 공연에서 모임의 주관자인 시인 빅토르 카사우스(Víctor Casaus)는 예정에 없던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당시 20세의 젊은 화가 겸 시인인 실비오 로드리게스(Silvio Rodriguéz)가 라틴 아메리카의 시인들의 시에 자신의 곡을 붙인 열두 곡의 노래를 페르난데스의 차례 다음에 부르도록 제안했다. 무대에 선 로드리게스는 감동적으로 노래를 소화했고, 그 자리의 관중들은 쿠바 신음유시의 탄생을 목격했다. 쿠바 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문화적 사건이 된 '시와 음악의 만남'은 그 날 이후 커다란 호응 속에 계속 이어졌다.
카사우스나 기예르모 로드리게스 리베라(Guillermo Rodríguez rivera) 등의 시인들은 읽혀지기 위한 시를 쓰는 대신 불려지기 위한 시를 썼고, 로드리게스는 그 시에 곡을 붙여 노래했다. 이후 많은 음악가들이 그러한 작업에 동참했으며, 쿠바의 신음유시는 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68년 평생을 동반할 음악적 동지 파블로 밀라네스(Pablo Milanés)를 만나게 되었다.
밀라네스는 로드리게스와 달리 어릴 때부터 민요를 부르며 자랐다. 그는 마르타 발데스나 포르티요의 필링에 영향을 받아 쿠바 민속 음악의 곡조를 주로 사용, 노래를 만들었다. 그의 음악적 주제는 '욜란다(Yolanda)'에서와 같이 사랑이나 혹은 시간의 흐름과 죽음 그리고 인권과 자유의 문제 등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음악적 스승을 가라이와 푸에블라로 삼고 있었다. 이어 아메리카의 집은 그들을 초청, 저항음악제를 개최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2년부터였다.
영화 예술 및 영화 산업 연구소에 속해 있는 음향 실험 그룹에서 만든 작품을 통하여 신음유시는 기악의 면에서의 발전의 출구가 마련되었다. 이 연구소에서 설치된 음향 실험실에서 대중 음악가와 예술 음악인의 밀접한 유대 관계 속에서 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이제 음유시는 다양한 악기들의 화려한 반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로드리게스와 밀라네스의 지도 아래 많은 음악가들이 모였으며, 결국 56명의 음악가들이 발기인이 되어 1972년 만사니요에서 신음유시 운동 본부가 설립되면서, 쿠바의 신음유시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산, 1년만에 공식 회원이 3,000명에 이르렀다. 이 조직의 기본 단위는 음유시 분대로 구성되어 대중 매체와는 별도로 자체 노래 보급 경로를 확보했으며, 공식적인 공연 무대 이외 각종 문화 센터, 광장, 공원, 카페, 거리 등에서 자유로운 공연을 했다. 당시 중요한 싱어-송라이터로는 노엘 니콜라(Noel Nichola)와 빈센트 펠리우(Vincente Feliú)였다. 이 운동에 마지막 영향을 준 것은 미국의 대중 음악-그 중에서도 밥 딜런(Bob Dylan), 바바라 데인(Barbara Dane),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이었지만 계속 쿠바의 고유성을 지켜 나갔다.
그들은 새로운 미학적 감성을 문화 운동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노래를 통해 잊혀진 전통을 복구했고, 역사를 기록하며, 민중을 대변하며, 사회에 끊임없이 의견을 제시했다.

최근에 이 노래 운동에는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는데, 이들은 음악 양식이나 시의 형식을 새로이 고치는 작업을 보여주고 서사시적 성격을 다소 배제하며 보다
독특한 방법으로 현재의 쿠바 사회의 상황을 반영할 수 있는, 보다 광범위하고 실제적인 주제를 탐구했다. 이들 새로운 경향의 대표자들은 아마우리 페레스(Amauri Pérez), 산티아고 펠리우(Santiago Feliú), 카를로스 바렐라(Caplos Varela), 도나토(Donato), 나벨 로페스(Nabel López), 캄포스(Campos)였다. 새로운 세대의 음유시인들은 선배들이 전통적 주제인 사랑과 조국을 노래한데 비해, 사색적인 성찰을 담은 일상성을 함께 노래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새로운 노래 운동의 발전은 대중 음악의 일반적 통합의 필수적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음유시는 전통 쿠바 음악이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수용, 혼합한 외래 음악과의 성공적인 산물이며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 문화 혁신 운동의 가장 화려한 업적 중의 하나를 이루어 놓았다.



6. 예술


은 그것이 태어난 현실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그 현실이 다른 사회집단끼리의 대립과 투쟁으로 흔들릴 경우에는 사회 집단의 주체인 민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들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역할을 맡는다.



라틴 아메리카의 노래는 처음부터 이러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가 노래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노래는 역사와의 연관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그 임무에 맞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동을 취해 왔다. 그러나 항상 노골적인 선동이나 추상적 슬로건보다는 오히려 실제적 경험에서 그 표현 방법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노래의 가치란 원인이 되는 한 현상에 대한 참여뿐만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다. 가령 문화적 질서가 필요한 국가에서는 대중 문화의 가치를 회복하는 보편적인 작업에 기초하여 민속의 연구와 보급, 잊혀진 전통의 회복, 민족적 뿌리의 추구 등을 힘쓰는 경우도 있으며, 또 다른 나라에서는 역사적 상황 때문에 사회적·정치적 주장, 즉 자유·독립·민주·민중의 생활 조건 개선·사회 정의 등을 지지하는 실제의 투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노래가 정치성을 띤다는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함을 느낀다.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즉각적인 투쟁, 정치·경제적 권력 구조에 의한 정당 또는 계급간의 투쟁, 이 투쟁에 대한 일상적 경험, 역사에 대한 그때 그때의 해석을 뜻한다. 점 더 넓게 본다면 민중의 관점에서 본 긴 역사의 시각, 현재의 사건의 배경과는 반대되는 그 무엇, 사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즉 진행되는 순수한 시사적 해석을 초월해 있는 실재, 숱한 세월을 통해 희생과 발견에 의해 형성해 온 문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의 역사를 뜻한다.
따라서 새로운 노래는 위의 두 가지의 의미에서 정치성을 띠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때로는 그것이 과거의 상황을 다루기도 하고, 문화 전파에 충실하기도 했지만 현재 발생되고 있는 것,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사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사건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 노래 운동을 보는 시각이 균형성을 잃지 않으려면 필요에 따라 이들을 분리하기도 하고 결합시키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될 일이다.



끝으로 살펴본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노래 운동에 대한 일반적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노래 운동은 대중 음악과 민속 음악 사이에 위치한다.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이 연결선 상에서 이 둘 사이를 넘나든다. 대중에게 호소한다는 점과 가능하다면 대중 매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 실재의 존재 방식의 면에서는 대중 음악 쪽으로 가까이 가지만, 그 민족주의적 의도로 민속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바로 이 점이 때로는 대중에게 접근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2) 새로운 노래 운동은 그것이 비전문가나 국제적인 청중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상업 음악의 경향에 반대하고, 항상 그 뿌리와의 동질성을 추구하며 민족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이 운동은 문화 침식 과정에 대한 반발이다. 이러한 반발은 음악 창작이 지향하는 방향성을 통해 나타난다. 대개의 경우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영어권 국가의 상업주의 음악의 침투이다.



(3) 새로운 노래 운동은 대중 음악의 여러 측면을 매우 다양하게 망라하고 있어서 그 형식적인 면을 가지고 단순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따라서 이 운동은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 전통의 모든 맥락을 한꺼번에 가질 뿐 아니라 새로운 발전으로 향하는 길목도 제시한다.



(4) 새로운 노래 운동이 민속에 가깝게 나타나는 나라에서는 민속에 대한 상당한 연구 업적을 남기고 있어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 문화의 뿌리를 되찾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문화적 동질성의 발견이나 민족 의식의 고취의 면에서 매우 중요한 작용 요인이 된다. 이 운동이야말로 외세 문화로부터 라틴 아메리카 문화를 지켜 나가는 최전방의 방어선이며, 과거로부터 되찾은 문화적 유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창조력으로 미래를 향한 발전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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