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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son(샹송)

조회 수 4046 추천 수 0 2005.10.05 11:43:45


이미지 아티스트, 아다모

샹송



샹송이라는 프랑스 말은 스페인의 칸시온이나 이탈리아어의 칸초네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어, 가요라든가 노래를 의미한다. 프랑스의 파퓰러송을 모두 샹송이라 말해도 무방하지만, 전통적인 샹송에서는 다른 나라들의 노래와는 상이한 몇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흔히 샹송은 한 편의 드라마라고 일컬어지듯이, 가사가 이야기로 되어 있는 것이 많은 것도 그 특색의 하나이리라. 곡은 쿠플레(couplet)라는 스토리 부분과 르프랭(refrain)이라는 반복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일상 대화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알기 쉬운 말을 쓰고, 때로는 아르고(은어)를 섞어서 엮는다. 세계 각국의 파퓰러송 중에서도 샹송에서는 특히 가사가 중요시된다. 따라서 샹송 가수는 단지 멜로디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사의 내용을 전하는 데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가수가 음악 학교는 나오지 않았더라도 대개 딕션(화법) 공부를 하는데, 이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리고 소리가 아름답다든가 음악적으로 정확하다든가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 곡을 어떻게 해석하여 개성적인 표현으로 듣는 이에게 전하는가 하는 점을 평가받는다. 이리하여 어떤 샹송을 처음으로 불러 성공시키는 것을 크레아시옹(creation)이라 한다. 이것은 창조라는 의미인데, 보통 초연이라고 번역된다. 샹송에서는 특히 이 크레아시옹이 존중된다.


즉 가수는 자기의 개성으로 샹송을 연기하고 부름으로써 작자와 공동으로 그 노래에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간주된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한 번 크레아시옹된 샹송이 초연자 이외의 가수에 의해 다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샹송도 외국의 노래와 같은 경향이 되어 크레아시옹의 의의는 약해지고 말았다.




- 샹송의 내력 -


어느 나라에서나 노래는 사람과 함께 태어난다. 샹송의 역사도 아주 오래되어, 아마 2천 년 전 옛날부터 프랑스인은 그들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 진보적인 교회의 수도사나 사제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퍼퓰러송의 형식을 사용하여, 보다 친해지기 쉬운 전도가를 만들려고 착안했다.

이리하여 성자의 업적을 이야기하고 신의 은총을 설명한 종교적인 샹송이 태어났다. 그 이외의 세속적인 것도 있었음에 틀림없지만, 간행되지는 않은 채 그늘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날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샹송은 <성녀 우라리의 이야기>라고 일컬어지는데, 이것은 881년 발랑센의 수도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마침내 중세 무렵이 되자, 순례자나 음유 시인들이 샹송을 만들어 그것을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즉, 트루바두르라고 불리는 음유 시인은 암부 프랑스를 중심으로 10세기 말부터 13세 경까지 성하게 활약했거, 샹송 드 제스트 등을 불렀다. 트루베르는 이보다 조금 늦게 북부 프랑스에 나타난 음유 시인인데, 주된 레퍼터리는 앞의 것과 같다. 둘 다 작가 겸 가수로서 반드시 자기가 작사, 작곡한 것을 불렀으며, 고귀한 집안의 출신자가 많아 성주들에게도 기사의 대우로 맞아들여졌다.


이에 대해 종글뢰르란 이를테면 떠돌이 가수로서 반드시 자작을 부를 필요는 없었고, 시장이라든가 예배당 등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노래하며 다녔다. 때로는 영주에게 고용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이때는 미니스트렐ministrel이라 불렀다.


쿠플레와 르프랭으로 이루어지는 샹송의 원칙적인 형태가 완성된 것도 음유 시인의 시대이며,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샹송이라는 말도 이 무렵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에서도 흔히 쓰이는 보드빌도 원래는 프랑스어로서, 같은 멜로디로 다른 쿠플레를 노래하는 샹송 포퓔레르를 가리키고, 그 어원은 15세기에 발 드 빌이라는 시골 거리의 애호가들이 사상 최초의 샹송 학교를 만든 사실에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이윽고 중세가 끝나 르네상스가 찾아와서 파리가 명실공히 프랑스의 중심으로 번영하기 시작한 무렵, 샹송의 주도권은 완전히 민중의 손으로 옮아갔다. 1600년대 초에 센 강에 놓인 퐁 뇌프가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 다리 위나 그 주변에는 가게가 늘어서 있었고,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거리의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야말로 노래를 직업으로 한 최초의 샹송 가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음유 시인들은 여행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노래는 그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거리의 가수들의 레퍼터리는 주로 시사 풍자의 노래였다. 그들은 당시의 정부 고관이나 귀족들을 신랄하게 비꼬아서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았다.


이처럼 노래로 풍자하는 것을 샹소네chansonner한다고 하고, 그 작자 겸 가수는 샹소니에chansonnier(e)라고 불렀다. 이 경우, 옛날부터 전해오는 멜로디나 남의 곡을 빌어 써도 상관 없지만, 가사는 반드시 자기가 지어야 하며, 더구나 날카로운 풍자를 내포하고 재치 있는 에스프리를 갖춰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의 샹송계에도 맥박치고 있으며, 조르주 브라생스는 그 계통의 위대한 아티스트로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다만 샹소니에의 정의는 근년에 상당히 허술해져, 작사가 겸 가수를 똑같이 이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도 많다. 또한 오래된 샹송의 작품집이나, 샹송을 들려주는 어떤 종류의 흥행장 중에도 샹소니에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현대샹송의 발달


- 레뷰의 전성 -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 대전은 샹송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쟁 승리의 기분에 취한 파리에서는 대규모의 레뷰가 있따라 상연되어 화려한 샹송을 낳았다. 파리의 뮤직홀에서 레뷰의 시초는 1886년에 폴리 베르제르에서 상연된 젊은이들의 광장이라는 쇼였다. 금세기에 들어서면, 바 탕 크랑, 올랭피아, 물랭 루즈 등의 뮤직홀이 잇따라 이 종류의 것을 흥행하여 인기를 모았다.


이러한 레뷰는 새로운 타입의 탤런트를 필요로 한다. 즉, 노래가 능란할 뿐만 아니라 스타일이 좋고 춤도 잘 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조건에 가장 어울리는 레부계의 대스타가 미스탕게트이며, 그녀의 상대역을 지내며 세상에 알려진 스타가 모리스 슈발리에였다. 전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18년에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 "파리 키 리"에서 공연하여 함께 톱스타가 된 미스탕게크와 슈발리에는 그 후 각자가 달리 활약했으며, 미스탕게트는 1926년부터 1930년까지 물랭 루즈의 여왕으로 갖가지 그랜드 레뷰의 주역을 연기했고, 사 세 파리 등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한편 슈발리에는 헐리우드에 초청되어 1928년부터 1935년까지 미국에 머물며 국제적인 영화 스타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레뷰가 화려했던 1920년대는 롤링 투엔티rolling twenty라고 불리는 동요의 시대이며, 샹송에서는 제2의 벨에포크이기도 했다. 이윽고 찾아오는 1929년의 경제 공황 등을 꿈에도 예상치 못하고 세상은 호경기에 빠져 있었다.


여성의 단발이 유행했고 이른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거리를 활보했으며, 여러가지 점에서 신기하고 이국적인 것을 좋아했다. 샹송계에도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파퓰러 송이 흘러들어와 프랑스어 가사를 붙여 널리 불려지게 되었다. 동부 아시아에 샹송이 들어와 뿌리를 내린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 한창 때인 1925년, 미국에서 온 흑인 댄서 겸 가수인 조세핀 베이커가 샹젤리제 극장의 "흑인의 레뷰"에서 찰스톤을 추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발을 올려차듯이 하면서 추는 이 쾌활한 댄스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누구나 찰스톤에 몰두했다. 마침내 베이커는 미스탕게트에 이어 레뷰계의 여왕이 되었고, 1930년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 "파리 키 르뮈Paris qui remue(꿈틀거리는 파리) 속에서 상표라고 할 만한 "두 개의 사랑"을 처음으로 불렀다.


그 무렵 카지노 드 파리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은, 1924년부터 이곳의 지배인이 된 앙리 바르너이다. 그는 본명이 앙리 방탈이라고 하며, 1887년 마르세유 태생이었다. 처음에는 리옹의 극장에서 연극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1910년 샤토 도라는 극장에서 레뷰를 상연하여, 쇼 비즈니스계의 거물로 많은 뮤직홀을 경영하는 오스카르 뒤프렌에게 인정받아 콩세르 마이욜, 앙바사되르 드으이 뮤직홀을 대리로 관리했다.


1924년에는 3000명 수용의 대뮤직홀 앙필을 설립하여 제1급의 스타를 출연시키는 동시에 카지노 드 파리에서는 레뷰를 흥행하여, 미스탕게트, 모리스 슈발리에, 조세핀 베이커, 마리 뒤바 등을 키워냈다. 후에 모가돌에서 공연하기도 하다가 1969년 파리에서 타계했다. 또한 앙필은 1931년에 영화관으로 바뀌어, 그 후 서커스와 오페레타를 상연한 적도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시네라마의 상영관이 되었다.


- 샹송 레알리스트의 융성 -


롤링 투웬티라고 해도 사람들은 쾌활하게 들떠서 떠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한편으로는 불안한 세태를 반영해서 어두운 현실적인 샹송이 융성하여 많은 팬에게 사랑받았다. 그 중심이 되었던 가수가 3대 샹퇴즈 레알리스트라고 일컬어진 다미아, 프렐, 이본 조르주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다미아는 뮤직홀 올랭피아의 무대에서 "이제르의 야간 보초"를 초연하여 그 명성을 결정지었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이 올랭피아의 지배인은 폴 프랑크였는데,

그가 추구한 의도는 어떤 의미로는 카지노 드 파리의 앙리 바르너와 대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20년에는 이본 조르주를 올랭피아에서 데뷔시켰고, 1923년에는 외국에서 방랑 생활을 하고 있던 프렐을 파리로 돌아오게 한 것도 그였으며, 1924년에는 리스 고티를 발굴했다.


무명 시대의 뤼시엔 부아예도 같은 무렵에 올랭피아의 무대를 밟고 잇었다. 1927년에는 마리 뒤바와 계약했고, 그녀는 여기서 "페드로"를 초연하여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리하여 폴 프랑크는 투르 드 샹의 전통을 지켰고, 올랭피아가 현재도 샹송의 전당으로 인정받는 기초를 쌓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물러난 다음에 이 홀은 1929년에 영화관이 되었으며, 그 후 1954년 브뤼노 코카트릭스가 지배인이 되어 현상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렇게 샹송 레알리스트는 뮤직홀의 화려한 무대를 통해 널리 소개되었는데, 처음에는 상당한 저항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예컨대, 1920년에 이본 조르주가 올랭피아에서 노래했을 때는 객석에서 심한 야유가 터져나왔다. 그녀의 레퍼터리인 선원의 노래, 특히 "발파라이소로 가자" 등을 파리의 청중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본 조르주는 1896년 태생의 벨기에 여성으로, 본명을 이본 드 쿠노프스라고 한다. 폴 프랑크는 그녀를 브뤼셀의 카바레에서 발견했는데, 파리 데뷔는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장 콕토 등의 후원을 얻어 다시 올랭피아의 무대에서 같은 노래를 불러서 갈채를 받은 것은 1926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광의 시기는 극히 짧았다.


폐결핵을 앓고 있었던 그녀는 1929년에 스위스의 결핵 요양소로 치료하러 갔으나, 죽음의 시기가 다가옴을 알고 그곳을 빠져나가 1930년 5월에 이탈리아 제노아의 낡은 호텔에서 홀로 외롭게 죽어갔다. 어쨌든 올랭피아의 무대에서 각광을 받은 샹퇴즈 레알리스트들은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활약하며 갖가지 명창을 남겼다.


- 레코드와 방송의 보급 -


1930년 전후의 시기는 샹송의 발달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그 하나는 디스크 대상의 제정이다. 현대의 ACC 즉 아카데미 샤를 크로의 디스크 대상은 캉디드라는 문예 주간지 주최로 시작되었고, 1931년 5월 제1회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때 뽑힌 샹송 레코드가 뤼시엔 부아예의 "들려줘요, 사랑의 말을"과 조세핀 베이커의 "서포즈"였다. 이것은 레코드가 상당히 보급되어 샹송의 매체로서 클로즈업되었음을 의미한다. 디스크 대상은 가수나 곡에 대한 일종의 권위 보증이 되기도 했다. "들려줘요, 사랑의 말을"은 14개 나라의 말로 번역되어 전세계에 유행했다.


1934년 티노 로시의 레코드는 45만 매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기상천외의 매상을 기록했고, 그 "비에니 비에니"는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섰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후 1952년도부터 ADF, 즉 아카데미 뒤 디스크 프랑세의 디스크 대상도 발족되어, 그 제1회의 그랑프리는 에디트 피아프의 "빠담 빠담"에 대해 주어진 바 있다. 방송이 실용화된 것도 1931년의 일이었다. 1921년 파리의 에펠탑에서 처음으로 시험 전파가 발사되고 나서 10년이 지나 이 해에 3개국의 국영 방송국(라디오 파리, 투르 타워 에펠, PTT)이 발족했다.


다시, 포스트 파리지엥, 라디오 툴루즈, 라디오 비취스, 라디오 LL(후의 라디오 시테)과 같은 민간 방송국도 만들어져, 사람들은 가만히 앉은 채 정보를 얻고 샹송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PTT나 라디오 파리는 종종 연주외의 실황 방송을 내보내거나 가수의 투르 드 샹을 방송하기도 하여 다미아와 미스탕게크 등의 목소리를 그 전파에 실었다.


- 토키의 발명 -


더욱 중요한 사실은 토키 영화의 발명이었다. 프랑스에서 토키에 의한 극영화가 제작된 것은 1929년의 "황후의 목걸이"와 "세 가면"이 최초였다. 같은 해 독일에서는 마를레네 디트리히 주연의 "부인, 손을 주세요"가 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한 발 앞서 1927년에 알 졸슨 주연의 "재즈 싱어"가 개봉되어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My mammy"의 노래 소리에 관객은 깜짝 놀랐다. 이 "재즈 싱어"는 1930년 파리에서 공개되어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도 르네 크렐 감독의 토기 제1작 "파리의 지붕 밑"이 만들어져 그 주제가가 대히트했다.


"파리나기"(원제는 "잠수 대장")에서는 조르주 밀턴이 부르는 "몽 파파C"est pour mon papa"가 갈채를 받았다. 1933년에는 르네 크렐 감독의 유명한 "파리제"(원제는 7월 14일)가 만들어졌고, 1934년의 "알몸의 여왕"에서는 주연인 조제핀 베이커가 "하이티"를 처음으로 불렀다. 1936년에는 티노 로시의 "마리넬라"(동명 영화의 주제가)가 있으며, 모리스 슈발리에의 "우리들"이 영화 "슈발리에의 유행인"의 주제가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즉 1930년대의 토키 영화는 샹송의 커다란 공급원이 되었고, 레뷰 무대에서 이들 새로운 매스 미디어로 진출하여 전대미문의 인기를 획득한 슈퍼스타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미남 가수 티노 로시였다.


- 샹송의 개혁 -


1930년대에는 이탈리아풍이나 라틴 리듬의 샹송이 환영받았고, 이국적인 노래가 히트한 시대이기도 했다. 물론 재즈도 널리 침투하여 미국의 파퓰러송의 창법을 사용해서 샹송을 개혁하려고 하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여류 작곡가 겸 가수인 미레유였다.


재즈는 1917년 12월에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 속에서 여성 가수 가비 데스리스에 의해 비로소 파리의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미국에서 귀환한 그녀는 함께 온 재즈 밴드를 반주로 노래와 춤을 선보여서 대단한 인기를 모았으나, 병 때문에 쓰러져 미스탕게트와 교체되었다.


1920년대부터 재즈의 기법은 조금씩 샹송 속에 도입되어, 폭스 트로트 풍의 노래 등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결국은 빌어온 것에 불과하여, 이제까지의 샹송과는 동떨어진 이색적인 분야를 형성하고 있었다. 미레유는 여성다운 섬세함으로 두 가지 면을 완전히 결부시켰다. 빠른 말로 리드미컬하게 부르는 독특한 창법을 개척하여, 새로운 형태의 샹송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더구나 그녀의 노래는 클래식 음악의 소양에 뒷받침되어 고상한 부드러움을 결코 잃지 않았다.


미레유는 1906년 파리 태생으로, 3세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파리 음악원에서 배웠으나, 손가락이 짧았기 때문에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을 단념하고 연극으로 전향하여 14세로 첫 무대를 밟았으며, 1926년에는 레뷰의 주역을 맡을 정도까지 되었다. 1931년에 그녀는 작사가인 장 노앙과 알게 되었는데, 노앙은 본명을 장 마리 르그랭이라 하며, 시인 모리스 르그랭의 아들로, 1900년 파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변호사를 거쳐 저널리스트가 되었고, 젊은이 대상의 신문을 편집하면서 시를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쉽게 의기투합하여 노앙 작사, 미레유 작곡에 의한 샹송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색다른 그들의 노래는 좀처럼 일반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윽고 그녀는 미국 순회 공연을 떠났다. 1933년에 귀국하자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1933년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 속에서 듀엣 팀인 필스와 타베(자크 필스와 조르주 타베)가 노앙과 미레유가 만든 "건초 안에 누워서"라는 노래를 불러 대히트시켰고, 그 레코드도 같은 해 4월 ACC 디스트 대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이 곡은 미국에서도 앤드류 시스터즈에 의해 불려진 바 있다. 필스는 후에 뤼시엔 부와예나 에디트 피아프와 결혼한 사람인데, 1932년에 알제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타베와 컴비를 이루어 이 곡에 의해 명성을 얻었다. 장 사브롱도 또한 미레유의 작품을 재빨리 다룬 한 사람으로서, 그는 무대 위에서 마이크로폰을 처음으로 사용한 샹송 가수로서 알려져 있다.


당시는 이러한 기계의 도움을 빌어 목소리를 확대한다든가 하는 것은 가수의 수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것을 사용했고, 스피커의 배치나 재생법을 연구하여 부드러운 목소리를 객석의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하여 청중을 놀라게 한 것은 1936년의 일이었다. 창법도 연구하여 빙 크로스비로 대표되는 미국의 크루너적인 창법을 샹송에 도입했다.


그밖에 1933년에는 반주에 재즈 기타의 명수 장고 라인하르트의 트리오를 기용하는 등 의욕적인 시도를 하여 샹송과 재즈를 결부시켰다. 이 사람들은 이를테면 1930년대의 샹송계에서 누벨 바그라고 할 만한 존재였다. 이윽고 그들의 업적은 샤를 트레네에게 계승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현대적인 샹송이 찬란히 꽃피게 되었다.




            샹송의 종류



샹송은 그 성립이나 구조, 혹은 다루는 테마 등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반드시 엄밀하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여기에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샹송 포퓔레르 ( chanson populaire )


민중의 노래라는 뜻의 샹송 포퓔레르는 영어의 팝송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유행가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샹송사에 있어서는 작자 미상의 민요나 이에 준하는 것을 말한다.
  


            샹송 사방트 ( chanson savante )


학식 있는 샹송이나 고급 샹송이라는 의미의 샹송 사방트는 샹송 포퓔레르에 비해 작자가 분명한 것을 말한다. 중세의 궁정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사랑의 노래가 많았다. 가사의 형식도 정돈되고 곡도 예술적이어서 샹송 포퓔레르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근대 샹송의 발달을 촉구시켰다.
  


            샹송 드 제스트 ( chanson de geste )


보통 무훈시라고 번역되는 샹송 드 제스트는 기사도가 화려했던 중세 무렵에 발달한 서사시의 일종이며, 12세기에 만들어진 4,000행으로 된 롤랭의 샹송 등이 유명하다. 대개 기사나 왕의 무훈을 찬양한 내용을 가졌고, 노래한다기보다는 음송되었다.
  


            콩플랭트 ( complainte )


역시 중세에 프로방스 지방에서 일어난 세속적인 노래의 일종으로, 로맨틱한 비련 이야기나 종교적인 수난과 기적 등을 엮었고, 애수를 내포한 가락을 지녔다. 16세기 경부터 주로 종글뢰르jongleur라고 불리는 음유 시인에 의해 성하게 불려졌다. 이 콩플랭트라는 명칭은 현대에도 전해져 샹송의 제목으로 흔히 쓰이며, 애가라든가 비탄의 노래로 번역되고 있다.
  


            로망스 ( romance )


원래의 중세의 음유시인(트루베르trouver나 트루바두르troubadour)이 불렀던 장편의 감상적인 이야기 노래였으나, 그 후 차츰 달콤하고 부드러운 노래를 널리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기악곡에도 적용되었다.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샹송 리테레르 ( chanson litteraire )


문학적 샹송을 말하며, 샹송 포퓔레르에 대해 샹송 사방트와 똑같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시인의 시에 작곡가가 곡을 붙인 작품을 말한다. 1567년 시인 장 앙투안 드 바이프와 음악가 티보 드 크루비유가 <시와 음악의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나서 이 장르의 샹송이 발달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샹송 리테레르는 크게 융성했고 이윽고 18세기의 카보나 19세기의 문학적 카바레가 그 주요 무대가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조금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제2차 세계 대전 후 부흥의 징조를 보이면서 오늘날의 샹송계에도 전통이 계승되어왔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에 의한 <미라보 다리>나, 루이 아라공의 시에 의한 <엘자의 눈동자> 등은 샹송 리테레르의 좋은 예이다
  


            샹송 레알리스트( chanson realiste )


현실적 샹송이라고 번역되는 샹송 레알리스트의 테마는 대개 사랑인데, 그것을 드라마틱한 수법으로 전개시켜 많건 적건 서민 생활의 가장 어두운 면을 리얼리티를 존중해서 그려낸다. 즐겨 다루는 주인공은 건달이나 매춘부, 선원이나 병사 등이며, 번화가나 항구가 그 드라마의 무대가 된다. 이 종류의 샹송은 19세기 말 경부터 대두하여 수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이것을 주된 레퍼터리로 하는 여성 가수를 샹퇴즈 레알리스트라고 한다. 남성인 경우는 샹퇴르 레알리스트라 하지만, 이 분야의 가수는 거의가 여성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이전, 다미아, 프렐, 이봉 조르주 등이 3대 샹퇴즈 레알리스트라고 일컬어지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전후에 샹송 레알리스트는 급속히 위축되었다.
  


            샹송 팡테지스트 ( chanson fantaisiste )


호나상적 샹송이라 번역되는 샹송 팡테지스트는 여러 가지 타입의 작품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분류로서, 자유 자재로 공상을 펼치며 엮은 샹송을 말하며, 재기에 넘치고 코믹한 요소를 갖고 있다. 주로 카페 콩세르나 뮤직 홀의 무대에서 불렸는데, 이것을 레퍼터리로 하는 남성 가수를 샹퇴르 팡테지스트라고 하며, 모리스 슈발리에, 샤를 트레네, 마르셀 아몽 등이 이 분야에 속한다. 여성 가수는 극히 적지만, 코르디는 대표적인 샹퇴즈 팡테지스트라고 할 수 있다.
  


            샹송 드 샤름 ( chanson de charme )


매혹의 샹송이라는 의미의 샹송 드 샤름은 주로 사랑을 주제로 한 감미로운 샹송을 말하며, 이것을 부르는 남성 가수를 샹퇴르 드 샤름이라고 한다. 이 말은 1930년대에 미성으로 당시를 풍미했던 티노 로시에 대해 처음으로 붙여졌고, 앙드레 클라보에게 계승되었다. 여성 가수의 경우는 샹퇴즈 드 샤름이라 하며, 뤼시엔 부와예 등이 이에 속하지만, 오히려 샹퇴즈 상티망탈(감상적 샹송 여가수)라 불릴 때가 많다.
  


이밖에 샹송 폴리티크( chanson politique ) 이미 중세 무렵부터 있었던 정치적 샹송, 샹송 앙가제(chanson engagee) 참여 샹송, 프로테스트 샹송, 혹은 샹송 드 메티에(chanson de metier) 직업에 관한 샹송 등 여러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Adamo - Adieu Jolie Candy





  Edith Piaf - Non, Je Ne Regrette R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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