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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West Africa 음악(신현준님글)

조회 수 4661 추천 수 0 2005.09.05 11:53:59



(펠라쿠티)
펠라쿠티와 페미 쿠티 그리고 아프로비트의 상속
     2000년 11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있었다. 수상자는 다름 아닌 당시 한국의 대통령 김대중이었다. 13일의 시상식을 앞두고 11일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하는 음악 공연이 열렸는데, 여기 참여한 아티스트들은 세계 각지에서 초대되었다. 나탈리 콜 Natalie Cole, 본 조비 Bon Jovi, 웨스트라이프 Westlife, 리 앤 워맥 Lee Ann Womack, 에로스 라마초티 Eros Ramazzotti, 시셀 같은 각국의 내로라하는 팝 스타들, 그리고 웨일스의 브린 터펠 Bryn Terfel과 한국의 조수미 같은 성악가들이 초대에 응했다.
     남은 한사람은 페미 쿠티 Femi kuti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국적은 나이지리아이니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이 행사에 초대된 셈이다. 나이지리아. <Smooth Operator>를 부른 '하프 나이지리언(half Nigerian)' 샤데이 sade, 그리고 한때 NBA를 주름잡은 '흑표범' 하킴 올라주원 Hakeem Olajuwon이 나이지리아와 조금 관련 있는 대중 스타들이다. 하지만 샤데이는 영국인이고 올라주원은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을테니 이 글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다.
     페미 쿠티는 누구인가? 펠라쿠티 Fela Kuti의 아들이라는 것이 이제까지의 설명이었다. 그의 아버지 펠라쿠티는 누구인가? 길게 부르면 펠라 아니쿨라포 쿠티 Fela Anikulapo Kuti이고, 짧게 부르면 그냥 펠라다. 그를 부르는 별명은 무수히 많다. 아프로비트의 제왕(The King of Afro-beat), 나이지리아의 밥 말리, 가난한 노동자의 목소리, 흑인 대통령(black President)‥‥‥ 1997년
     펠라가 에이즈로 사망했을 때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Lagos)의 거리는 수백만 인파로 가득 찼다. 반정부 재야 정치단체인 나이지리아 통일민주전선(United Democratic Front of Nigeria)의 공식 발언도 있었다. '당신을 잘 알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당신은 결코 평생을 바쳐 싸워온 악과 타협하지 않았다고. 시간과 운명 때문에 가끔 약해지기도 했지만 당신의 의지는 언제나 강했우며,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아프리카라는 당신의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최상의 찬사다.
     이런 아버지의 가업을 장자상속한 페미 쿠티는 이날 어떤 음악을 연주했을까. 열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밴드 포지티브 포스 Positive Force와 함께 <Beng Beng Beng>이라는 곡을 연주했다. 무겁고 강럭한 베이스 라인이 넘실대는 훵키한 사운드 위에서 페미 쿠티는 웃통을 벗은 채 마이크와 색소폰을 번갈아 잡고 연주했다. 밴드 멤버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이사이 곡예 같은 동작을 보여준다. 이날의 공연은 아니지만 그의 밴드의 공연을본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각각의 곡들은 다양한 섹션을 통해 이동해간다. 페미 쿠티의 보컬에 대해 여자가 응수하고 드럼이 강조점을 찍어준다. 불규칙하게 변동하는 비트 위에서 색소폰 라인은 마치 주문을 외는 듯하면서 소용돌이친다" (Jon Pareles  "Femi Kuti and Positive Force: Putting Smile on Father's Music" New York Times, September 20,1999)
      <Beng Beng Beng>이 수록된 앨범 <Shoki Shoki>는 메이저 음반사인 유니버설 산하의 MCA 레이블을 통해 2000년 국제적으로 배급되었다. 페미 쿠티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미국과 영국의 여러 도시를 순회 하면서 클럽 투어를 가졌고, 2000년 여름에는 각종 페스티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각종 상복을 누렸다. <shoki Shoki>는 '코라 올 아프리카 뮤직 어워드(Kora All Africa Music Awards)'에서 '최고 남성 아티스트(Best Male Artist in Africa)' 부문을 수상했고, 2000년 5월 모나코에서 개최된 '2000월드 뮤직 어워드(2000 World Music Awards)' 에서는 '베스트 셀링 아프리칸 아티스트(Best-Selling African Artist)' 상을 받았다.
     그 사이 페미 쿠티는 미국의 힙합/R&B 뮤지션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특히 시카고의 힙합 뮤지션인 커먼common은 페미 쿠티의 얼터 에고(alter ego)라고 불릴 정도다. 커먼은 자신의 앨범 <Like Water for Chocolate>(2000)에 펠라 쿠티를 추모하는 <Time Travelin'(A Tribute to Fela)>을 실었고 페미 쿠티는 이 곡의 녹음에 참여했다. 그리고 2001년 10월 발매된 페미 쿠티의 앨범 <Feight to Win>에는 커먼뿐만 아니라 모스 데프 Mos Def, 재규어 Jaguar, 비스티 보이스 Beastie Boys의 머니 마크 Money Mark가 참여해서 아프로비트와 힙합의 연대감을 과시했다.
     페미 쿠티의 정력적 활동은 펠라 쿠티 작품들의 재발매 붐으로 이어지고 있다. 1999년 MCA는 펠라 쿠티의 앨범 20종을 '2 for 1'으로 묶어서 10종의 CD로 재발매했고, 1970년대 펠리의 레코딩을중심으로 베스트 앨범 <The Best Best of Fela Kuti>도 발매했다. 이런 움직임은 2002년 펠라쿠티에 대한 '올스타 트리뷰트 앨범' 인 <Red Hot + Riot: The Music and Spirit of Fela Kuti>의 발매로 절정을 이루었다. 에이즈 퇴치를 위한 비영리기구인 레드 핫(Red Hot Organization)에서 시리즈로 발매하는 자선 앨범이자 펠라 쿠티에 대한 트리뷰트 앨범이다. 여기에 참여한 면면은 흑인'음악과 아프리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다른 장과는 달리 최근 뉴스에 많은 비중을 할애한 것 같다. 하지만 최근의 일련의 흐름은 아프로비트라는 음악이 단지 나이지리아 음악이 아니라 국제적 음악이 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아마도 아프로비트는 제3세계의 흑인 음악 가운데 레게 이후 가장 국제화에 성공한 음악일 것이다. 그래서 아프리카로 떠나는 음악 여행은 나이지리아가 있는 서아프리카에서 시작한다. 서아프리카권은 노예무역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듯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픈 역사를 가진 곳이다 이런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저개발, 빈곤, 외채, 내전, 에이즈등등. 그래서 페미 쿠티의 음악을 소개한 한 잡지는 '아버지의 음악에 미소를 입히
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아버지의 음악에 왜 미소가 없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이를 위해 그의 고국 나이지리아, 그리고 나이지리아가 속해 있는 서아프리카의 문화적 상황부터 살펴보자. 미소가 없던 시공간으로...

서아프리카, 그 비극의 역사
     아프리카 대륙이 ㄱ자 모양임을 떠올려보자. 서아프리카라는 지역은 ㄱ자에서 수평선의 아래 면, 그러니까 사하라 사막 남쪽에서 대서양을 따라 도열한 나라들이 포함된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순서대로 말하면 세네갈, 감비아, 기니비사우,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아이보리코스트, 가나,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 등이 서아프리카에 포함된다. 그 위로 사하라 사막과 맞닿은 내륙지방에 있는 말리, 니제르, 차드 등도 서아프리카에 포함된다.
     서아프리카 연안의 항로는 사하라 사막을 거치는 육로와 함께 유럽과 아프리카사이의 무역이 이루어지는 길이었다. 15세기 이전까지 아프리카에서는 금, 소금, 상아, 목재 등을 수출하고 구슬, 도자기 비단을 수입 하는 정상적 무역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16세기에서 19세기 말까지 무역의 대상에는 '사람' 이 포함되었고 이들은 대서양을 건너 수출되었다. 이른바 대서양 노예무역이다. 한 추산에 따르면 약 1,5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대서양을 건너갔고, 그 중 2분의 1은 카리브 해, 3분의 1은 브라질(과 남아메리카), 나머지는 미국(과 북아메리카)으로 팔려가 그곳에서 노예로 살았다. 물론 대서양을 건너기도 전에 사망한 사람도 부지
기수다. 따라서 현재 아메리카 대륙과 카리브 해의 섬에 거주하는 흑인들의 뿌리를 확인할수 있다면 서아프리카가 태반을 차지할 것이다.
     아프리카의 왕국에는 이전부터 노예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거나 노예무역은 유럽의 탐험가들이 아프리카치 지배자들과 맺은 자발적 계약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노예무역의 궤멸적 결과를 역전시키기는 힘들다.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의 역정도 힘겨웠겠지만, 아프리카의 왕국들도 경제적으로 황폐해지고 정치적으로 허약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19세기 말부터 유럽 열강에 의한 '아프리카의 분할(scramble)'이 시작되었고, 20세기가 시작 될 무렵에는 90퍼센트 이상이 유럽의 식민통치에 들어가서 20세기 후반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때의 '스크램블'의 결과로 형성된 경계선이 오늘날 아
프리카 독립국들의 국경선이다. 문제는 새로운 국경선에 의한 구분이 파워 게임에 의해 자의적으로 그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정치적 독립을 달성한 1960년대 이후에도 아프리카 각지에서 내전이 빈발하는 것은 이런 민족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가 황폐해지기 이전 아프리카에는 어떤 왕국이 있었을까. 16세기경 서아프리카 지역에는 월로프, 가나, 말리, 아샨티, 요루바, 송가이라는 왕국이 존재했다. 이들 가운데 현재 당시의 영토와 일치하는 국민국가를 세운 나라는 말리 정도다(가나 왕국은 현재의 가나 공화국과는 위치가 다르다). 나머지는 다민족국가의 한 민족이 되었다. 예를들어 말리는 말리, 월로프는 세네갈, 요루바는 나이지리아(참고로 송가이는 니제르)에 거주하는 하나의 민족으로 전락했다. 우연이겠지만 이 세 나라(와 세 민족)가 현재 서아프리카의 음악 문화를 주도하는 나라들이다. 그럼 먼저 가나와 나이지리아의 음악에 대해 알아보자. 이는 이 나라(민족)의 음악이 국제무대에 알려진 순서를 존중 하기 위해서이지 별다른 이유는 없다.

  영어권 서아프리카의 음악들
     가나의 하이라이프
     서아프리카, 정확히 말하면 시에라리온에서 나이지리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주도적인 음악 장르는 하이라이프(highlife)다. 나아가 하이라이프는-뒤에 볼 콩고의 수쿠(soukous)와 더불어 -범아프리카적 음악이라고 할 만한 종합이다. 하이라이프의 원산지는 가나이고 실제로 가나에서 가장 인기가 높지만,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에 못지않다는것이다.

     먼저 확인해둘 점은 하이라이프가 20세기 이후에 형성된 대중음악이지 토속음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 스타일에 대한 정의는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간명한 정의는 '아프리칸, 캐러비언, 하와이안 음악의 혼종' 이라는 것이다. 하이라이프는 서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음악 문화가 섞여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서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자, 항해사, 선교사등 유럽의 백인,그리고 자유의 몸이 되어 아프리카로 귀환한 노예들 모두가 하이라이프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래서 하이라이프는 음악 장르일 뿐만 아니라, 좋은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쓰고 클럽의 비싼 입장료를 내는 계층의 생활을 가리키기도 했다. 또한 1920년경에는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dance band highlife)와 기타 밴드 하이라이프(guitar band highlife)라는 두 갈래를 탄생시켰다. 식민지 시대 고급생활자를 위한 음악은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라고 불렸다.
     E.T. 멘사 Emmanuel Tettey Mensah와 그의 밴드 템포스 The Tempos는 1940년대 후반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었다.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는 색소폰과 브라스가 주도하는 스타일로 빅 밴드 시기의 미국 재즈에 비견할 수 있다. E.T. 멘사는 하이라이프를 다른 서아프리카 나라들에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1956년 루이 암스트롱과 협연하면서 아프리카 이외 지역에도 알렸다.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는 E.T. 멘사 외에도 램블러스 인터내셔널 Rambler's International과 우후루 댄스 밴드 Uhuru Dance Band 등에 의해 가나의 도시에서 큰 인기를누렸다.
     한편 농촌 지역에서 성장한 기타 밴드 하이라이프는 팜 와인 기타 (palm wine guitar)라고 불리는 독특한 기타 주법과 사운드를 발전시켰다. 앞서 말한 '하와이안 음악의 영향'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팜 와인 기타의 독특한 기타 피킹은 뒤에 서아프리카 지역 전체로 파급되었다. 1950년대 EK 니아메 EK Nyame와 그의 밴드 아칸 트리모 Akan Trio(아칸이란 가나의 주요 민족 중 하나다)가 음악과 희극을 결합시킨 '콘서트 파티 (concert party)' 라는 장르를 발전시키면서 전기를 맞았다.
     하이라이프가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음악 장르로 인식된 데는 정치적 배경도 존재한다. 다름 아니라 사하라사막 이남에서는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한 가나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범아프리카주의의 창시자 은크루마 Kwame Nkrumah가 하이라이프를 가나의 문화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 당시 E.T.멘사는 '가나의 음악적 대사'라는 비공식적 칭호를 얻었다.
     하이라이프는 1970년대에 국제무대의 문을 두드렸다. 1960년대 후반에 테디 오세이Teddy Osei가 이끈 오시비사 Osibisa가 그 주인공으로 이들의 음악은 아프로록(Afro-rock)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다. 아마도 아프리카에서는 최초로 탄생한 '서양적' 형태의 음악일 것이다. 이들의 <Dance the Body Music> 등은 런던 등 서아프리카계 이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유럽의 대도시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이런 국제화의 한 단면으로 독일의 뷔르거-하이라이프 Burger-highlife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가나 이주민에 의해 독일에 뿌리내린 독특한 혼성 음악이다.
     하이라이프는 나이지리아에서도 인기가 높다. 1951년 E.T. 멘사가 나이지리아에 공연을 다녀갔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보비 벤슨 Bobby Benson은 나이지리아에서 하이라이프의 스타가 되었다. 그는 나이지리아 음악인연맹의 초대 회장을 지낼 정도로 대중음악계의 실력자였다. 그렇지만 하이라이프는 나이지리아의 전국적 음악이 되지는 못했다. 이는 나이지리아의 복잡한 민족 구성,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1960년대 후반의 이른바 비아프라 내전 때문이다. 하이라이프는 나이지리아에 거주하는 이보(Ibo)족이 즐기는 음악이었는데 이보족이 당시 군대와 정치권력을 독점하던 북부의 하우사-풀라니(Hausa-Fulani) 민족이 이끄는 연방정부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이를 진압하려는 연방군과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결국 반란군인 이보족은 패퇴했고 그 공백은 요루바족 (Yoruba)이 메우게 되었다. 요루바족의 음악은 주주(juju)라고 불린다.

    나이지리아의 주주와 후지

   아프리카이 민속음악 가운데서도 요루바족의 음악 전통은 리듬,특히 복잡한 폴리리듬으로 정평이 있다. 물론 요루바족의 전통음악 스타일이 하나였던 것은 아니다. 주주는 아기그디보(agigdibo), 웨레(were), 아팔라(apala), 사카라(sakara), 와카(waka) 등의 리듬을 통합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하이라이프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기타와 관악기라면, 초기의 주주에서 인상적인 것은 북을 비롯한 타악기다. 특히 토킨 드럼이라 불리는 북은 3성을 갖는 요루바어의 특징을 살려서 실제 의사소통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다양한 사운드를 내는 중요한 악기다.
    주주 역시 하이라이프와 비슷한 시기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무렵에 형성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1920년대에 바바툰데 킹 Babatunde King이라는 인물이 요루바족의 전통 댄스 리듬에 기타, 밴조, 아코디언, 우쿨렐레 등이 결합된 스타일을 주주라는 용어로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1930년대에는 팜 와인 기타가 도입되고 1940년대에 토킹 드럼이 추가 되면서 주주의 고유한 사운드를 확립했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주주가 하이라이프보다 상대적으로 토착적이고 따라서 언더그라운드적인 음악이었다. 즉, 주주는 요루바족 하층계급(이전에는 주로 농민 이후에는 주로 노동계급)의 정서를 반영한 음악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주주는 1950년대 이후 현대화되는 단계를 맞이하여 1970년 내전이 끝날 무렵에는 농촌 주민뿐만 아니라 도시의 노동계급과 빈민을 주요 청중으로 확보하면서 나이지리아를 대표하는 장르로 떠올랐다. 그 주역은 '모던 주주의 아버지' I.K. 다이로 Isaiah Kehinde Dairo(1930~1996)였다. 젊은 시절 도시의 노동자로 전전하던 그는 1960년 이바단(Ibadan)에서 개최된 나이지리아 독립기념 행사에서 블루 스파츠 Blue Spots라는 밴드를 이끌고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이듬해인 1961년에는 이바단의 TV 방송국에서 개최한 콘테스트에서 다른 밴드를 압도하며 나이지리아의 주주를 대표하는 밴드로 부상했다.
     1970년 내전이 끝나면서 주주는 킹 서니 아데 King Sunny Ade, 에벤에제르 오베이 Ebenezer Obey , 애드미럴 델레 아비오둔 Admiral Dele Abiodun, 세군 아데왈레 Segun Adewale 등에 의해 계승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토킹 드럼, 기타 라인, 선창과 후창식의 보컬은 여전히 주주의 기본 요소였지만 기타는 전기 기타로 바뀌었고 페달 스틸 기타와 퍼커션도 도입되었다. 특히 킹 서니 아데와 에벤에제르 오베이는 숙명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면서 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가수이자 기타리스트이자 밴드 리더인 두음악인은 더 많은 기타, 더 많은 페달 스틸 기타, 더 많은 보컬 코러스, 더 많은 연주시간을 도입하면서 필사적인 경쟁을 벌였다.

     주주도 하이라이프에 이어 1980년대 초 국제무대의 문을 두드렸다. 1982년에 킹 서니 아데와 계약한 아일랜드 레이블은 그를 '나이지리아의 밥 말리'라고 홍보하면서 시장 진출을 노렸다. 결과는 밥 말리만큼의 성공은 아니었다. 에벤에제르 오베이도 버진(Virgin)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앨범을 발표했지만 성과는 킹 서니 아데와 비슷했다. 에벤에제르 오베이가 198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Montreaux Jazz Festival)에서 수상을 하는 등 주주는 재즈계에서는 나름의 인정을 받았지만, 대중음악으로서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1970년대 이후 나이지리아 국민들에게 사랑받은 장르가 주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주만큼 국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지(fuji)라는 음악도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후지는 주주에 비해 퍼커션의 역할이 커지고 기타의 비중은 작아진 음악이다. 아팔라,사카라, 와카등의 전통 리듬을 융합한 후지 역시 요루바족의 음악인데, 주주와는 달리 기독교 문화가 아닌 이슬람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닥터 알하지 시키루 아인데 배리스터 Dr. Alhadji Sikiru Ayinde Barrister는 1970년대 이래 후지의 슈퍼스타로 군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배리스터가 후지라는 일본식 이름을 떠올린 것은 영국의 록 밴드 저팬 Japan의 <Mountain of Love>를 들은 직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언급한 펠라쿠티의 아프로비트는 언제 어떻게 출현했을까. 시기적으로는 1970년대 초반이므로 킹 서니 아데나 에벤에제르 오베이 등의 전성기와 다르지 않다 펠라쿠티 역시 요루바족에 속하므로 주주음악인으로 부를수 있을까. 그렇게 부르지는 않는 것 같다. 그건 킹 서니 아데와 에벤에제르 오베이 등이 이미 존재하고 있던 주주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인물인 반면, 펠라 쿠티는 전혀 다른 음악적 방향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알아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서아프리카의 음악 가운데 1980년대 국제무대에서 파란을 일으킨 음악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의 음악


     1980년대의 월드뮤직 웨이브 그리고 파리

     세네갈, 감비아, 기니 , 말리 등 서아프리카에서도 서쪽에 위치한 지역은 이른바 프랑스어권 서아프리카에 속한다. 이곳은 시에라리온에서 나이지리아에 이르는 지역과는 또 다른 음악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 월드 뮤직 웨이브가 밀려왔을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더불어 - 아프리카산 월드 뮤직을 가장 많이 수출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지역의 음악적 전통을 특징짓는 키워드는 그리오(griot)다. 그리오는 이 지역에서 직업 음악인에 해당하는 존재였는데, 단지 음악인이 아니라 구비전승 시인이자 역사 구송자를 지칭했다. 미국의 랩 음악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시작될 때 그 기원을 '서아프리카의 그리오의 전통'에서 찾는 담론들이 꽤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그리오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오는 이 지역, 그가운데서도 특히 말리의 음악장르를 가리키는 용어로 와전되어 실제로 일렉트로 그리오(electro griot)라는 단어가 세네갈, 감비아, 기니, 말리의 대중음악 스타일을 통칭하기도 한다. 악기 면에서는 5현 기타인 샬람(Xalam), 토킹 드럼의 일종인 타마
(tama), 실로폰과 유사한 발라폰(balafon), 하프의 일종인 코라(kora)등이 이 지역의 음악적 전통을 이루는 한부분이다.
     1980년대 중반 월드 뮤직 웨이브가 본격화될 때 이런 음악적 전통에 기초한 음악인들이 국제무대에 대거 선을 보였다. 말리 출신의 알리 파르카투레 Ali Farka Toure, 살리프 케이타 Salif keita, 우무 상가레 Oumou Sanggare, 그리고 세네갈의 유쑤 은두르 Youssou N'dour, 이스마엘 로Ismael Lo, 체이크 로 Cheikh Lo, 바바 말 Baaba Maal. 베냉의 앙젤리크 키조Angelique Kidjo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음악 스타일은 각기 달랐지만 프랑스어권 서아프리카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파리를 거점으로 전세계로 전파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즉, 이들의 음악은 영미권 등 다른 지역에서도 히트했지만 그건 직수입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파리라는 테스트 시장을 거쳐 들어오는 성격이 강했다.

     파리가 월드 뮤직의 본산이 되고, 프랑스가 아프리카 음악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명확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재 프랑스를 제외하고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들 대부분이 아프리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음악에 대해 프랑스의 음악산업계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현상을 영미권 음악의 문화적 지배에 대한 프랑스의 응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살펴보자. 아프리카 음악의 중계무역에서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은 프로듀서 이브라이마 실라 Ibrahima Sylla다.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출신으로 국제적 스타덤에 오른 아프리카 출신 아티스트들 의 음반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라는 1970년대 뉴욕에서 살사를 들여온 데 이어 아프리카 가수들의 음반을 꾸준히 제작 해오고 있는 일명 '지구적 음악 상인(global music merchant)' 이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제작된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산 월드 뮤직이 어떤 것인지를 차근차근 살펴보려면 여러 나라 여러 아티스트의 음악을 정리해야 한다. 그렇지만 한 나라에 집중해보기로 하자. 바로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전회 우승국 프랑스를 꺾는 등 이변을 연출하여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네갈이다.


     유쑤 은두르와 음발라

     세네갈은 서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라다. 제4장에서 언급한 카부베르데에서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 나라가 세네갈이기도 하다. 특히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Dakar)는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일찌감치 국제화된 도시다. 1960년 독립을 달성한 뒤 대통령 자리에 오른 레오폴드 생고르 Leopold Senghor라는 인물이 20년 동안 통치를 계속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안정을 이룩한 나라이기도 하다. 비록 장기집권이지만 쿠데타와 내전으로 얼룩진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낫다는 이야기다.
     세네갈의 지배적 민족은 월로프(Wolof)족이고, 이들이 즐기는 음악은 음발라(mbalax)라고 부른다. 물론 음발라는 월로프족의 토속음악이 아니라 국제화의 산물이다. 즉, 1950 ~60년대부터 지역의 전통과 국제적 영향이 혼합된 산물이다. 앞서 언급한 그리오의 구술 음악의 전통에 더해진 월로프족 특유의 타악기 리듬이 음악적 뿌리다. 여기에 (역)수입된 아프로쿠반 음악, 그리고 미국의 재즈와 소울의 영향을 흡수하고, 때로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음악의 전통도 가미된 음악이다. 예를 들어 바오바브 오케스트라 Baobab Orchesra 같은 존재는 아프로쿠반 음악을 연주 하면서 한시대를 풍미했다.
     음발라 음악은 1970년대 이후 더욱 서양화되고 국제화된 스타일로 국제무대에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선구자는 유쑤 은두르다. 그는 1959년 다카르의 빈민촌인 메디나(Medina)의 한 월로프족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어머니에게 그리오를 전수받아 4옥타브 이상을 오르내리는 음역의 목소리를 갖게 된 이 인물은 열 살 무렵에 이미 숙련된 뮤지션이 되어 열두살 때부터 무대에 오른다. 물론 출발은 댄스클럽 밖의 주차장에서 행인의 주목을 받는 데 그쳤지만 나중에는 당시 세네갈의 스타 밴드 오브 다카르 Star Band of Dakar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에투알드다카의 Etoile de Dakar를 거쳐 슈퍼 에투알드 다카르 Super Etoile de Dakar로 밴드 이름이 정착할 무렵인 1979년경에는 유쑤 은두르가 밴드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1984년부터는 유럽 투어도 시작했다. 이것 역시 처음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세네갈 이민자들의 택시기사동업조합의 도움을 받은 초라한 것이었지만, 그의 음발라 음악이 서양의 팝스타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국제무대를 돌파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피터 가브리엘 Peter Gabriel의 <So>(1986)에 수록된 <In Your Eyes>를 듀엣으로 부르고, <Shaking the Tree>를 공동으로 작곡하면서부터다. 곧 가브리엘의 동지가 된 유쑤 은두르는 1988년 국제사면위원회에서 개최한 'Human Rights, Now !'의 세계 순회공연에 공동 헤드라이너로 참여했고, 그 뒤 1980년대 말부터 유행한 각종 메가콘서트에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참여했다.

     이런 일련의 활동을 통해 유쑤 은두르는 단지 대중 스타가 아니라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한 예로 그의 메시지와 활동에 영향받은 세네갈의 청년들은 1990년대 이후 'Set-Setaal(Be Clean)'이라는 기치 아래 환경 청결, 주거 개량, 수도 공급 개선 등의 시민운동(이자 생태운동)을 전개했다. '외국인에게 아프리카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자'는 식의 그의 메시지가 온건하고 계몽적이라는 견해에 대해 비판적 시선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유쑤 은두르 개인에 대한평가를넘어 1980년대 이후 영미권을 포함한 국제적 슈퍼스타들의 양심적 활동 전반에 대한 평가와 맥을 같이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그가
1980년대 젊은 아프리카의 상징적 인물이었다는 점은 틀림없다.

     세네갈출신의 다른음악인으로는 유쑤은두르와더불어 음발라를 대중화한 체이크 로와 이스마엘 로를 들 수 있다. 체이크 로는 재즈, 살사, 수쿠(뒤에 살펴볼 콩고의 대중음악)를 뒤섞은 댄스지향적 스타일을, 이스마엘 로는 기타와 하모니카가 중심인 포크 성향의 스타일을 각각 선보여 비교적 익숙하게 다가오는 편이다. 투레 쿤다 Toure Kunda는 음발라와 유사하지만, 자브동(djabdong)이라는 전통종교 의식에서 연주하는 음악의 영향이 강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참고로 투레 쿤다는 산타나의 메가 히트 앨범 <Supernatural>(1999)에 수록된 <Africa Bamba>에서 코러스를 맡았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들에 의해 세네랩(senerap) 또는 타수 (tassou)라고 불리는 세네갈 힙합도 탄생했고, 그 가운데 포지티브 블랙 포스Positive Black Force는 프랑스에서도 꽤 유명하다. 이와 관련해서 프랑스의 유명한 래퍼 MC 솔라르 Mc Solaar가 세네갈에서 이주한 인물이라는 점도 지적해둘 만하다.

    이들은 대체로 월로프족의 음악 전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바바 말처럼 세네갈 북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풀라니의 전통음악, 특히 코라(kora)라는 하프를 닳은 악기를 사용한 음악을 구사하는 인물도 있다. 여기서 풀라니족이라는 말을 잘 기억해두기 바란다. 이 민족이 세네갈에서는 소수민족이지만 나이지리아에서는 하우사족과 함께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기도 하며, 니제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인구를 갖고 있다는 점이 이후의 이야기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에는 유쑤 은두르 같은 1980년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음악인들의 온건하고 타협적인 활동과는 대조적으로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메시지를 전달한
음악과 음악인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다시 나이지리아와 펠라쿠티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흑인 대통령, 펠라쿠티

      나이지리아, 험악한 현대사

      앞서 조금씩 언급했지만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자. 먼저 나이지리아는 1억이 넘는 인구와 92만 4,00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국토를 가진 대국이다. 인구가 1억이 넘으니 통계적으로는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주민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나이지리아사람인 셈이다. 국토 면적은 미국의 10분의 1 정도라서 아프리카권 나라 가운데 더 큰 나라도 많지만, 서아프리카의 해안과 평야를 차지하고 있는 덕분에, 사막과 정글이 대부분인 나라와는 질이 다르다. 게다가 노른자위 땅에 석유도 매장되어 있어 세계 10위 안에 드는 산유국이기도하다.
     이런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아니 좋은 조건 때문인지 이 나라의 운명은 험난하기만 하다. 한마디로 나이지리아는 유혈 쿠데타의 천국, 아니 지옥이다. 1960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지금까지 40여 년의 기간중에서 30년을 군부 독재정권 치하에서 보내야 했고, 1999년 말 가까스로 자유 선거에 의해 민정으로 이양된 상태다. 그나마 민선 대통령 올루제군 오바산조 Olusegun Obasanjo도 1976년에서 1979년까지 군부의 임시정부 수반으로 재직했던 경력이 있다. 한때 중진 개발도상국에 속했지만 지금은 세계 최빈국 20개국에 속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정치적 소요가 심각했던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복잡한 세력관계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민족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나이지리아 연방은 현재 30개의 주(state)로 구성되어 있는데, 민족은 자그마치 250개가 넘는다. 3대 민족은 하우사-풀라니, 이보, 요루발인데, 하우사와 풀라니는 다른 민족이지만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런 민족의 분할은 지역, 종교, 계층의 구분과 대략 일치하면서 민족 갈등이자 지역 갈등이자 종교 갈등이라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에는 하우사-풀라니가 거주하고 있고, 남부 지역은 다시 동부에 거주하는 이보와 서부에 거주하는 요루바로 구분된다. 하우사 풀라니는 이슬람 교도이며, 이보는 기독교신자가 대부분이지만 로마카톨릭 교도도 많고, 요루바는 이슬람과 기독교 신자가 절반 정도씩 차지하고 있다. 하우사-풀라니는 군인과 정치인을 많이 배출하고, 이보와 요루바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16세기 이후 '노예사냥'의 주요 대상도 이보족과 요루바족이었다. 특히 18 ~19세기에 요루바족은 여러 왕국들 사이의 내전으로 인해 자신들이 잡은 전쟁 포로를 노예상인의 총과 화약으로 교환했다.
     이런 복잡한 민족 문제는 독립 후 채 6년이 지나지 않아 표면화되어, 급기야 30개월 동안의 비극적 내전을 낳았다. 발단은 1966년 1월 동부 출신 군인에 의한 쿠데타였고, 이는 각지에서 일어난 정치적 테러를 거쳐 같은 해 5월 북부 출신 군인의 쿠데타를 낳았다. 그 직후 동부의 군부가 이보족을 중심으로 한 비아프라(Biafra)라는 이름의 독립국가를 선포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비아프라 내전(공식 명칭은 국민 통일 전쟁(National Unity War))이다. 내전은 1970년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약 200만 명이 사망했다(공식 통계로는 10만 명이지만). 이때 이후 민정 이양이라는 공약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
하고 1979년부터 1983년 사이의 예외적 기간을 제외하곤 최근까지 군부독재가 이어졌다.
     이러니 나이지리아의 음악인들이 활동하는 환경은 극히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 나이지리아의 음반시장 규모는 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다음으로 크고, 한 해에 2,000~3,000여 종의 음반이 발매된다는 추정 통계가 있다. 이렇게 큰 시장 규모에도 불구하고 어떤 음악인이 한 정권의 사랑을 받다가 불시에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권에 '부역'한 혐의로 음악인으로서의 운명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독재정권답게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 음악인에 대해 상이나 훈장을 수여하는 일도 많았는데, 음악인들은 여기에 협력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역으로 말하면 이는 독재정권마저도 중요성을 인정할 정도로 나이지리
아국민에게 대중음악이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는 한편으로 종교적 색채가 강한 전통적 공동체가 많이 남아 있다는 점도 중요한 작용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간접 지배 기간중에 정당, 언론,노동조합, 각종 협회 등 근대적 제도가 발달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 공동체와 근대적 제도 모두에서 대중음악은 중요한 요소였고, 군사정부의 살벌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말살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전통적 공동체와 근대적 제도의 외양을 모두 갖춘 '칼라쿠타 공화국(Kalakuta Republic)'이라는 이상한 곳을 찾아가보자. 이곳은 레코딩 스튜디오와 리허설 공간을 겸한 곳이고 '사당 이라는 뜻의 슈라인 (Shrine)이라는 이름을 가진 클럽도 있다. 이곳의 주인은 대마초를 공공연히 물고 다니고, 팬츠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27명의 여인과 합동 결혼식을 올린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는 어떠한 군사정부와도 타협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왕국을 가꿔왔다. 그가 바로 펠라다.


    펠라 쿠티, 음악은 미래의 무기
    펠라는 1938년 라고스 북쪽의 아베오쿠타(Abeokuta)에서 목사이자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와 신여성이자 정치운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펠라는 정치와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고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그 덕에는 1958년 런던으로 의학을 공부하러 떠날 수 있었다. 잠깐 귀국했던 일을 제외한다면 1970년 나이지리아에 정착할 때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디아스포라를 겪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앞에 언급했듯 나이지리아가 정치사회적 격변을 겪던 시기였다.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펠라는 트리니티 대학의 음대에 등록했다. 하지만 유럽 고전음악을 공부하는 일에 흥미를 못느껴 학교를 때려치우고 쿨라 로비토스 Koola Lobitos라는 밴드를 조직했다. 펠라와 쿨라 로비토스는 런던의 재즈(와 하이라이프) 씬에서 연주했는데 그는 자신의 음악을 아프로비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 펠라는 크림Cream과 블라인드 페이스 Blind Faith라는 전설적 록 밴드의 드러머인 진저 베이커 Ginger Baker, 그리고 흑인 급진단체인 블랙 팬더당과 관련을 가지고 있던 샌드러 이시도어 Sandra Isidore와 교류하게 된다. 이 둘은 각각 음악적인 면에서, 그리고 사상적인 면에서 펠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아프로비트라는 이름은 '아프리카의 비트'라는 과대망상적 생각을 담고 있는데, 이에 더하여 미국 팝 음악의 트렌드에 기울어 있던 아프리카 연주인들에 대한 못마땅한 감정도 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펠라의 음악은 제임스 브라운 등의 훵키한 소울의 영향이 지배적이었고, 그 결과 이름이 풍기는 느낌이나 펠라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아프로비트는 아프리카의 음악 장르중 아메리칸 소울의 영향이 강한 스타일 이라는 인상을 준다. 아프로비트가 훵크의 나이지리아적 변종 이상이 되기 위해선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1970년 나이지리아에 정착한 펠라는 앞서 언급한 칼라쿠타 공화국을 차렸고 그와 동시에 밴드의 이름을 다시 아프리카70 Africa70으로 개명했다. 이런 활동은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 즉, 펠라는 소울과 훵크에 요루바 음악의 리듬을 결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나이지리아에서 펠라가 발표한 음악은 드럼과 베이스가 만들어내는 백비트 강한 훵키한 리듬을 기초로 하고, 전기 기타, 콩가 등의 퍼커션, 여성 보컬 등으로 폴리리듬을 만들어낸다. 그 위에서 펠라는 색소폰과 전기 오르간의 솔로와 노래를 번갈아가면서 선보인다. 펠라는 주로 영어로 노래 하지만 억양이 독특하고 요루바어가 섞여 있어서 미국 흑인 음악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그는 뚜렷한 멜로디를 노래한다기보다는 주술을 외우듯 툭툭 내뱉는다. 여성 코러스와 선창과 후창을 반복할 때는 부족의 전통 의식을 주재하는 부족장 같아 보였다. 그 결과 펠라는 아프리카적인 것만도 아니고 아메리카적인 것만도 아닌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정력적인 레코딩과 라이브 활동을 통해 펠라는 1972년경에 이미 대스타가 되었다. 또한 그는 단지 대중 스타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들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군사정부의 탄압도 시작된다. 1973년부터 정부의 감시를 받던 펠라는 1974년 대마초 소지 혐의로 50명의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1977년에는 1,000명의 군인이 펠라의 집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여성 멤버들을 성폭행 하고, 급기야 77세인 펠라의 노모를 2층에서 떨어뜨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나이지리아의 초기 페미니스트라고 불릴 수 있는 펠라의 모친은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고, 펠라 본인도 뼈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다.

     왜 이런 탄압이 발생했을까. 무엇보다도 펠라의 가시에 담긴 메시지 때문이었다. 1974년의 <Expensive Shit>이란 노래는 자신을 마약 복용 혐의로 구속한 당국을 조롱하는 노래였고, 게다가 1년 뒤에 발표한 <Roforo's Fight>(1975)에 수록된 (Go Slow)에서는 고속도로를 건설 하기 위해 토지를 수용하려는 정부를 비아냥거리면서 민중들에게 "천천히 다녀라"라고 설파했다. 1977년 앨범 <Zombie>에 실린 동명의 곡에서는 군인과 정치인들을 영혼 없는 무의지한 인간인 좀비라고 칭했고, <Upside Down>과 <Everything Scatter>에서는 정부의 난폭함과 관료의 무능을 꼬집었다. 이 곡들은 금지 처분을 받았고, 뒤이어 칼라쿠타 공화국으로 군인들이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Sorrow, Tears and Blood>는 이때의 비극을 그린 것이다.
     사건 직후 잠시 가나로 망명한 펠라는 다시 돌아와 MOP<Movement of People>라는 비공식 정당을 만들었다. 나아가 1980년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음악활동에도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 시기에 그의 밴드는 이집트80 Egypt80으로 개명했는데 이때 발표한 <Black President>(1981)와 <Original Sufferhead>(1984)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시장에도 소개되었다. 이 작품들에서 펠라의 음악은 아프리카 음악도 아메리카 음악도 아닌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해갔다. <Colonial Mentality)나 <ITT>처럼 메시지도 더 강렬해졌다. 1983년 다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1년 뒤인 1984년 펠라는 라고스 공항에서 외화 도피라는 미심쩍은 명목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국제사면위원회의 노력으로 18개월 만에 가까스로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에도 펠라쿠티의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또다시 일어난 군사 쿠데타로 인해 노조, 언론, 정당 등에 대한 무차별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펠라쿠티의 가문도 군부의 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펠라뿐만 아니라 그의 형인 베코 랜섬 쿠티 Beko Ransom Kuti 역시 유명한 반체제 인사였으며, 쿠티 가문은 1993년 선거 때부터 다시금 감시와 사찰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펠라는 정치적 탄압과 더불어 에이즈와도 싸워야 했다. 그 와중에도 펠라는 "결코, 결코 멈추지 말고 싸워라(Never never stop fighting)"라는 감옥에서의 선언, 그리고 "음악은 미래의 무기 (Music is the weapon of the future) 라는 평소의 신조를 실천해나갔다. 펠라는 1997년 군부에 의해 마리화나 소지 및 복용 혐의로 연행되어 다시금 일주일 정도 구속된 뒤 석방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도 펠라쿠티는 흑인 대통령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으로 불리며, 밥 말리와 더불어 블랙 파워의 대표적 아이콘이 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음악과 행동은 모순적이라. 미국적인 음악으로 식민주의에 대항한 인물이었고, 존중받는 급진적 음악인이자 정치인인 한편 사생활에서는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가장이었다. 다행이라면 그의 아들인 페미 쿠티는 일부일처주의자이고 현대적 페르소나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서아프리카에서 음악의 의미

    이상으로 서아프리카의 음악을, 국제무대에 소개된 순서를 존중해서 살펴보았다. 다시 한 번 요약한다면 1970년대에는 가나의 하이라이프와 나이지리아의 주주, 그리고 1980년대에는 세네갈의 음발라와 말리의 그리오 등이 런던과 파리 등 유럽에서 각광을 받고 이를 통해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이 장의 마무리는 서아프리카의 음악이 국제무대에 진출하는 양상과 결과를 검토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서아프리카권 나라들 대부분이 정치정제가 불안하고 국내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외국에서의 음악 활동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서아프리카산 음악 가운데 어떤 것도 기대한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여기서 '기대한 만큼' 이란 1950년대까지 쿠바음악이나 1970년대부터 자메이카 레게가 거둔 만큼의 성공을 말한다. 즉, 서아프리카 음악은 아직까지 국제적 대중음악계의 메인스트림이 된 적은 없다고 말할수 있다. 유쑤 은두르나 페미 쿠티의 경우 어느정도 국제적 스타의 지위를 확보했지만 그것은 개별 아티스트의 성공일 뿐이고 일군의 음악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흐름으로 연결되지는 않은것 같다.
      서아프리카 음악인들의 음반 가운데 국제적 성공을 거둔 음반들이 '짧은 곡 길이'라는 서양 대중음악의 포맷에 적응한 것들이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나라에서 연주하는 방식대로 녹음한 음반들은 한정된 수요만을 충족시켰을뿐이다. 아프리카의 음악은 "공연장에서 청중을 밤새도록 춤추게 할 수는 있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히트곡이 되기는 힘들다"는<뉴욕타임스>의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그래서 서아프리카의 음악인들은 재즈 페스티벌이나 월드 뮤직 페스티벌에 초대되어 공연할때는 호평을 받아도 막상 음반을 발매하면 반응이 신통치 않다는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서아프리카에서 음악의 역할'이라는 일반적 주제를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아프리카인의 음악에 대한 관념은 유럽이나 북아메리카는 물론이고 다른지역의 사람들과도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환기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음악은 아프리카인의 삶의 모든 측면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목적이다. 음악은 아프리카인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삶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프리카의 언어에는 '음악'에 해당하는 명사가 없다고 하는데, 바로 이 점이 아프리카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아무리 다른 지역의 음악과 뒤섞여서 변형되더라도 이런 본질은 계속 남아 있을것이다.
     한 가지 추가한다면 아프리카 음악에는 본래 유럽 음악에 존재하는 멜로디, 화성, 리듬의 구분이 없었다. 아프리카인이 아니라면 '아프리카 음악에는 멜로디와 화성은 없고 리듬뿐이라 단조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이런 구분 자체를 넘나드는 음악관을 가지고 있다. 즉, 아프리카 음악에서 우리가 리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프리카인의 삶의 리듬 그 자체를 묘사한 것이다. 페미 쿠티가 "아프리카의 특정 지역의 리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리듬에 대한 아프리카적 접근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따라서 음악을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소리' 정도로 정의한다면 아프리카의 음악은 결코 즐겁지 않다. 예를 들어 킹 서니 아데의 10분이 훌쩍 넘는 '기타의 거미줄(guitar web)'이나 종종 LP의 한 면을 다 채우는 펠라쿠티의 '설교'는 그저 지루하기만 할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서 아프리카 음악이 좀처럼 대중음악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음악들은 그들의 삶을 표현한 것이기에 그자체로 느끼는 것이 최선의 감상법일 것이다.
     그래서 서아프리카음악의 진면목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이들의 삶에 대해 좀더 깊이 공감하면저 국제적으로 알려진 작품들 이외의 음악을 더 깊숙이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한 번의 여행으로 가능하지는 않을것이다. 이건 다음 여행으로 미루기로하자.
     그 전에 일단 낯설다는 인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아프리카 음악 가운데 조금 낯익은 음악을 찾아 발길을 남쪽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아프리카 음악 가운데 가장 서양음악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것이 남아프리카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외부에서도 아프로비트를 연주하는 이들이 있을까. 먼저 한때 나이지리아의 종주국이자 펠라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영국 런던에저 아프로비트는 슈라인'이라는 사운드 시스템 (이동식 디스코텍)과  스트러트 레코드(Strut Records)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곳에서 아프로비트를 주도하는 인물은 펠라쿠티와 함께 연주한 경력이 있는 나이지리아계 영국인 델레 소시미 Dele sosimi다.
     아프로비트는 대서양 건너 뉴욕에도 파장을 낳고 있다. 뉴욕에서는 데스코(Desco) 라는 인디 레이블의 올스타 그룹이자 소속 가수들의 백업 밴드인 소울 프로바이더스 The Soul「Poviders, 그리고  소울 프로바이더스의 멤버와 아프리카 뮤지션들이 게스트로 참여한 프로젝트인 댁터리스 Dakataris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댁터리스의 앨범 <Soul Explosion>(1998)은 펠라의 사망 이후 가장 발빠르게 그를 추모하면서 아프로비트에 대한 관심을 일깨운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또 하나의 아프로비트 그룹은 바리톤 색소폰 주자인 마틴 앤티 밸러스 Martin Antibalas가 이끌고 댁터리스와 소울 프로바이더스에 참여했던 멤버들로 이루어진 13인조그룹 앤티밸러스 아프로비트 오케스트라 Antibalas Afobeat Orchestra다. 이들은 활발한 음악 활동을 전개함과 더불어 브루클린에 위치한 진보적인 커뮤니티 센터인 엘 푸엔테(El Puente)와 긴밀하게 관련을 맺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아프로비트의 반복적이면서도 주술적인 음악적 특징 때문인지 뉴욕의 애시드 재즈턴테이블리즘 계열의 DJ들 중에서 펠라의 레코드를 음원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펠라의 트리뷰트 음반 <Afrobeat‥‥No Go Die ! : Trans-Global African Funk Grooves>에 한 곡을 수록한 그루브 컬렉티브 Groove Collective를 비롯하여 엑시큐셔너스 The X-Ecutioners, 피프쓰 플래툰 The Fifth Platoon 그들이다.

     아프로비트는 단지 펠라 쿠티를 전설로 박제화하고 페미 쿠티를 통해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여러 갈래로 분기하면서 확산되기 시작 했음을 알수 있다. 펠라쿠티의 아프로비트 자체가 미국적이지도 아프리카적이지도 않은 것이었지만 여전히 나이지리아라는 지역성(locality)의 딱지가 붙었다면, 역으로 현재 발생하는 아프로비트의 국제화는 탈지역화(delocalization)의 양상을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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