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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자리아 에보라의 '국적'을 찾아서

최근 국내의 중소 음반사인 2clipse에서 '월드 사운드'라는 별도의 레이블을 설립하고 세 종의 음반을 발매했다. 쎄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의 [Live a l'Olymopia], 에르미나(Hermina)의 [Coracon Leve], 그리고 베빈다(Bevinda)의 [Terra e Ar]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들 포르투갈어(혹은 그 '사투리')로 노래부르는 디바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국적이나 활동무대가 포르투갈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이들의 음악은 어떤 것인지 더듬어 보기 위해 이들 중 가장 이름이 알려진 쎄자리아 에보라부터 시작해 보자.

사진설명 : 세자리아 에보라, 모르나의 여왕
쎄자리아 에보라라는 이름을 처음 인지한 것은 에미르 쿠스트리챠의 영화 [Underground]의 사운드트랙에서였다. 당연히 그녀가 유고슬라비아거나 아니면 동유럽의 어느 나라 출신인 줄로 알고 있었다. 사운드트랙을 담당한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c)가 1970년대 '유고슬라비아의 비틀스'라고 불리던 Bijelo Dugme(흰색 버튼)를 이끌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 나의 심증을 더욱 굳혔을 것이다(참고로 Bijelo Dugme의 음반은 홍대 앞의 한 중고 음반점에서 '골동품 가격'으로 매매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트 록'의 범주에 분류된다는 뜻일텐데, 실제로 이들의 음악은 아트 록과는 거리가 있다).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Ausencia"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도 영화의 분위기가 너무 강했던 탓인지 동유럽의 민속 음악 같았다. 현악기 중심의 반주와 풍성하고 영적인 목소리도 그랬다. 가사가 무슨 언어인지를 구별해낼 능력은 없었으므로.

두 번째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한 곳도 영화 사운드트랙이었다.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on)이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을 현대물로 각색한 [The Great Expectations]의 사운드트랙에 "Besame Mucho"를 부른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베사메 무초? 모자를 쓰고 기타를 든 멕시코인이 선인장들이 서있는 사막 사이에서 부르는 노래 아닌가? 그렇다면 '라틴' 음악인인가? 하지만 이 노래야 멕시코 음악이라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이니 꼭 그쪽 출신이 노래를 부르라는 법은 없다. 하다 못해 노태우가 (당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1987년 여름 축하연장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영화의 내용도 그녀의 국적과는 무관한 내용이었다.

세 번째로 에보라의 이름을 발견한 것은 [Red Hot + Rio]라는 음반에서였다. 1996년에 라이센스로 발매된 음반이지만 불행히도 나의 눈에 띄지는 못했다. Red Hot 시리즈가 AIDS 퇴치 기금마련을 위한 자선음반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 것이고, Rio라는 이름은 '브라질'을 떠올리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에보라의 이름은 "E Preciso Perdoar"라는 곡의 크레딧에 나와 있었다. 그렇다면 브라질 출신? 하지만 이 음반에 참여한 뮤지션들은 그야말로 세계 각국에서 온 인물들이라서 음악 장르는 쌈바, 보싸노바, 뜨로삐깔리즈무 등 브라질의 음악일지언정 연주자의 국적을 확인하기는 곤란했다. 이 곡마저도 '브라질의 밥 딜런'이자 뜨로삐깔리즈무 운동의 대부인 까에따누 벨로주(Caetano Veloso)와 함께 '영어'로 노래했고, 편곡은 일본 출신의 국제적 음악인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가 담당했으니까.

'녹색의 곶(Cabo Verde)'을 향하여

그녀의 음반 중 한 종이 수입될 무렵 궁금증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고 까부 베르드(Cabo Verde)와 모르나(Morna)라는 키워드를 건졌다. 전자는 지명이고, 후자는 음악 장르명이다. 고등학교 때 보던 먼지 풀풀 나는 지리부도를 뒤져서 찾아본 까부 베르드(영어로는 Cape Verde)는 서아프리카 대륙에서 500km 떨어져 대서양 한 가운데 있는 아홉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제도(諸島)였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니'라는 느낌을 줄 만한 곳이다. 대륙을 다섯 개로 구분한다면 '아프리카'에 속하는 곳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아프리카 대륙과는 차이가 많다. 여기에는 아프리카에 속한 지역으로서는 아메리카 대륙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지리적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프리카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이 섬의 최초의 주인은 흑인이 아니라 포르투갈인들이었다. 한때 영국인들이 섬을 노리기도 했지만 1975년까지 포르투갈인의 지배 하에 있었다. 1456년 포르투갈인들이 이 섬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windy, hilly and dry"라는 소개 문구를 보면 바람이 많이 불고, 구릉이 많고, 건조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녹색의 곶'이라는 뜻의 이름(Cape Verde)을 붙인 것은 이 섬에 인간이 처음 상륙했을 때의 아름다움을 말해줌과 동시에 머지않아 이곳이 목초지로 개간될 것임을 말해준다. 이곳에 이주한 포르투갈인들은 여느 백인 식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서아프리카로부터 흑인 노예를 수입해 왔고, 나아가 (서)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특히 브라질) 사이에 노예를 실어 나르는 배들의 정박지로 '번영'을 구가했다. 그렇지만 1747년 커다란 가뭄이 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이후 계속된 가뭄으로 인해 18-19세기 동안에만 수만 명이 아사했다. 그 이유는 삼림의 개발과 가축의 방목으로 인해 섬에 습기를 공급해주던 초목들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9세기 중반 이후 노예무역이 쇠퇴하면서 까부 베르드는 황량한 섬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까부 베르드의 역사는 이민과 독립이라는 상반된 사건으로 점철되었다. 황폐화된 섬을 두고 주민들은 아메리카와 유럽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이는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현상이다. '외국에 친척을 두지 않은 까부 베르드의 가정은 없다'는 말처럼 '이산의 이산(diaspora of diaspora)'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 그 결과 현재의 인구는 40만명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독립국이 되는 길도 험난했다. 오래전에 국력이 쇠퇴한 포르투갈의 독재자 쌀라자르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도자들처럼 아프리카의 식민지의 독립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까부 베르드는 같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포르투갈령 기니아(정식 명칭 Guinnea-Bissau)와 더불어 1975년까지 기나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지속해야 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영국(및 프랑스)이 지배했던 식민지와 포르투갈(및 스페인)이 지배했던 식민지가 다른 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서로 다른 인종 사이의 결혼을 허용한 것, 이른바 잡혼(雜婚)이다. 앵글로-색슨 백인들이 보통 부인을 동반하여 식민지로 이주했던 반면, 이베리아 반도의 백인들은 남자 혼자 단신으로 식민지로 이주한 경우가 지배적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백인 남자들은 흑인과 인디오 등 '유색' 인종의 여자를 새로운 짝으로 맞이했고 이는 까부 베르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카보 베르드 주민 대부분은 흑인보다는 연한 피부색을 가진 크레올(creole)이다. 사용하는 언어도 포르투갈어와 더불어 '아프리카화된 포르투갈어'인 끄리오울루(Crioulo)가 있다. 그래서 까부 베르드의 문화는 아프리카보다는 브라질과 가깝다. 이는 음악 문화에서도 드러난다.

모르나(Morna): 까부 베르드의 블루스?

재즈 애호가라면 "Song for My Father"로 유명한 재즈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를 알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조가 까부 베르드 출신이라는 사실은 잘 모를 것이다. 또한 호레이스 실버의 음악이 까부 베르드의 음악과 큰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까부 베르드의 문화는 아프리카보다는 포르투갈의 영향이 더 강하고 음악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역별로 다소의 차이는 있는데 수도 쁘라이아(Praia)가 위치한 가장 큰 섬 싸웅 띠아구(Sao Tiago)에는 아프리카의 영향이 다른 지역보다 강하다. 어쨌든 까부 베르드의 여러 섬에는 아프리카 리듬의 영향이 강한 댄스 음악들이 많고, 그 중에서 푸나나(funana)와 꼴라데이라(coladeira)가 가장 유명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노래 형식'이라기보다는 '댄스 리듬'이므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현재 까부 베르드를 대표하는 음악 형식은 모르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모르나는 포르투갈(및 브라질)의 멜로디와 화성이 아프리카의 퍼커션, 리듬과 결합된 스타일이다. 모르나의 기원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까부 베르드에 들락거리던 영국 선원들의 뱃노래(이른바 'sea-chantey')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설이 있고, 1800년대 브라질에서 형성된 모디냐(modinha)가 선원들에 의해 수입되어 변형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어떻다고 하더라도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남)유럽, (서)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사이의 음악 문화가 빚어진 것은 분명하다. 어떤 경우라도 파두, 모르나, 모디냐 모두 문화적 상호교류의 산물이라는 점만을 확인해 두자. 모르나는 '노래'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고, 노랫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라는 점에서 '까부 베르드의 블루스'라고 할 만하다.

모르나의 기본 악기편성은 기타, 피들(바이올린), 콘트라베이스이고, 피아노와 아코디언도 많이 사용된다. 기타는 최소한 한 대 이상이 사용되며, 기따라(guitarra)라고 부르는 12현(때로는 10현)의 악기나 비올라(viola)라고 부르는 - 혼동스럽지만 스패니시 기타와 거의 같다 - 악기도 자주 사용한다. 기타 형식의 악기로는 까바끼뉴(cabaquinho)도 있다. 작은 크기에 4현으로 이루어진 까바끼뉴는 북아메리카에서 자주 사용하는 우쿨렐레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트럼펫, 색소폰, 클라리넷과 같은 관악기들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여기에는 1960-70년대 쿠바와 미국의 대중음악이 직·간접적 영향을 미친 사실이 작용한다.

대서양의 망망대해 위에 있는 외딴 섬의 광경은 여느 휴양지와 다름 없다. 번듯한 산업은 없고 활양한 빈민촌과 번듯한 호텔이 공존하고 주민들 대부분은 관광과 연관된 일로 생계를 잇는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태어났을까'하는 느낌의 고립감, 수없이 사람들이 찾아오고 떠나면서 만들어지는 그리움이 섬 주민들의 보편적 정서일 것이다. 모르나의 가사의 테마는 사랑과 이별 등 '통속적'인 것들이다. 그렇지만 통속적 감정에서 나오는 슬픔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빌리 할러데이(Billie Halliday),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alia Rodrigues)....그리고 '라이벌 없는 모르나'의 디바인 쎄자리아 에보라도 여기에 속한다.

쎄자리아 에보라: 맨발의 디바 혹은 까부 베르드의 빌리 할러데이

쎄자리아 에보라를 포함한 모르나 아티스트들 중에는 싸웅 비쎈뜨(Sao Vicente) 섬, 특히 그곳의 도시인 민델루(Mindelo) 출신이 많다. 항구 도시인 민델루는 바와 카페, 그리고 음악이 많은 곳이었고, 에보라는 1941년 여기서 태어나 일곱 명의 남매와 함께 자랐다. 그의 아버지 프란시스꾸 샤비에르 다 끄루스(Francisco Xavier Da Cruz)는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그곳의 유명한 작곡가인 레자(B. Leza)와 사촌관계였다. 10살 때 레자가, 2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형제들은 하나 둘 이민을 떠나기 시작했고, 에보라는 12살의 나이에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그녀는 결국 형제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까부 베르드를 떠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에보라는 레자가 작곡한 곡에 민델루의 전설적인 음유 시인 에우제니우 따바레스(Eugenio Tavares)의 시를 가사로 만들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7살 때부터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그녀는 1960년대 후반에는 까부 베르드 전체에 이름이 알려졌다. 이 무렵 라디오 방송을 녹음한 테이프 두 종이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에서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1970년대 중반 그녀는 더 이상의 활동을 포기했는데, 무엇보다도 '노래 한 곡 당 25 에스꾸두(약 800원)를 받는' 민델루의 상황에서는 노래부르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개인적 불행도 겹쳤는데 12살 때의 첫 번째 결혼을 포함하여 모두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일생을 사는 동안 한 지붕 안에 남자를 들이지 않겠다"는 쓰라린 결론만을 낳았다. 시련과 고통의 나날은 폭음과 폭연의 나날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나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여러 여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남편들이지요. 그게 내가 지금 '악'의 근원을 잘라 버리려는 이유입니다".

'악의 근원'을 잘라버린 에보라가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은 1985년 45세의 나이에 포르투갈로 건너가면서부터다. 그렇지만 이 녹음은 까부 베르드 출신 여가수들의 앤솔로지 형식의 앨범을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대중적인 레코딩은 아니었다. 그녀를 현재의 지위로 등극시킨 것은 동향 출신으로 파리로 이민하여 살고 있던 쥬제 다 씰바(Jose Da Silva)였다. 다 씰바와 더불어 에보라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네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그 과정을 잠시 요약해 보자.

1988년 첫 앨범 [La Diva aux Pieds Nus(맨발의 디바)]가 Lusafrica 레이블에서 발매됨. 1988년 10월 1일 파리의 뉴 모닝에서 첫 콘서트를 연다.
1990년 두 번째 앨범 [Distino di Belita]을 발매.
1991년 세 번째 앨범이자 어쿠스틱한 분위기의 [Mar Azul(푸른 바다)] 발매. 앙굴르므(Angouleme) 페스티발에서 연주하고, 지에 그녀에 관한 최초의 기사가 실린다.
1992년 [Miss Perfumada(향기로운 처녀)] 발매. 프랑스에서만 20만장이 판매되면서 저널에서는 에보라를 빌리 할러데이와 비교하기 시작한다.
1993년 5월 리스본의 싸웅 루이스 극장(Teatro Sao Luis)에서 공연을 가지고, 한달 뒤 파리의 올랭피아 극장에서 역사적인 공연을 가짐. 공연 도중 두 명의 프랑스 관객이 무대 위로 뛰어드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공연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음.
1994년 브라질의 싸웅 빠울루에서 콘서트를 가짐. 까에따누 벨로주(Caetano Veloso)가 우정 출연.
1994년 다국적 레이블 BMG에서 명곡들을 모은 편집 앨범을 배급(제작은 루즈아프리카 레이블).
1995년 앨범 [Cesaria]가 그래미상 월드 뮤직 부문을 수상.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브라질, 캐나다, 미국 등에서 공연을 가짐.
1996년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홀에서 공연을 가짐.
1997년 [Cabo Verde] 발매하고 본격적인 전미 순회공연을 가짐.
1999년 [Cafe Atlantico]를 발매. 모르나와 더불어 쿠바 음악의 영향이 강한 스타일의 곡을 선보임.
2000년 쿠바 혁명광장의 국립극장에서 공연하고, 쿠바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 추코 발데스(Chucho Valdes)와 함께 레코딩 작업.

쎄자리아 에보라, 맨발을 드러내지 않은 디바

사진설명 : 세자리아 에보라, 맨발을 드러내지 않은 디바
첫 앨범의 제목처럼 에보라는 '맨발의 디바'라고 불린다. 그녀가 민델루의 거리를 맨발로 산책하기를 즐겼고 공연장에서도 종종 맨발로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인 데서 연유한 별명이다. '월드 뮤직'이라는 범주를 마케팅하기 위해서는 '자연주의적'이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이미지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에보라의 경우 이런 마케팅이 가식적이거나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맨발은 남자한테 버림받은 여자가 시련을 거친 끝에 비로소 터득한 자립의 의지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까부 베르드 여자들의 유달리 고단한 삶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건 마치 그녀의 목소리와 동일하다. 줄담배와 와인으로 쩔은 목소리는 아름다운 음색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폭발적 창법으로 분출하지도 않는다. 그저 세계에서 가장 예외적인 곳에서 자란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보편적인 공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음악이 주는 공감은 가장 예외적 경험을 한 사람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가장 길고 넓었다는 역설도 얼마든지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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