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agent: * Allow: / Mozilla/5.0 (compatible; Yeti/1.1; +http://naver.me/bot)
  • 즐겨찾기link
  • 홈페이지
  • 로그인
  • 회원가입
World

South Africa(신현준님글)

조회 수 4286 추천 수 0 2005.09.05 12:12:16



  (사진 Mahlathini)

휴 마세켈라 혹은 30년의 망명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음악에 대한 인트로에 알맞은 인물은 미국의 팝 음악인 폴사이먼 Paul simon, 그리고 알맞은 텍스트는 그가 1986년 발표한 <Gaceland>일 것이다. 아니면 한스 짐머 Hans zimmer가 스코어를 맡은 영화 <The Power of One> (1992)'의 사운드트랙도 괜찮을 것이다. 실제로 두 앨범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중요한 음악인들이 참여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음악을 국제적으로 알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백인' 음악인을 주인공을 내세우는 일이 찜찜하니 이 음악들과 관련 있는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싶다. 그 주인공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재즈 트럼펫 연주자 휴 마세켈라 Hugh Masekela가 적임일 것이다. 폴 사이먼이 <Graceland>를 발표한 뒤 짐바브웨의 하라레(Harare)에서 가졌던 공연 실황을 담은 비디오<Graceland : The African Concert>에서 트럼펫을 부는 곱슬머리의 인물이 마세켈라다.
그렇다면 그는 그저 숙련된 관악기 세션 주자인가. 공연 뒷부분에서 폴사이먼이 그를 소개하면서 노래(<Stimela>)까지 부르게 한걸 보면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폴사이먼 같은 거물급 아티스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공연에서 자신이 작곡하지 않은 곡을 다른 인물에게 맡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니까. 개인적 소견이지만 이 비디오에서 가장 인상적인 곡이었다.
이보다 더 오래된 자료가 또 하나 있다. 록 페스티벌의 역사를 개막했다는 것으로 유명한 1967년의 'The Monterey Pop Festival'을 담은 비디오다. 이 공연에도 사이먼(당시에는 사이먼 앤 가펑클)과 마세켈라가 모두 참여했다. 물론 같이 공연을 한 것이 아니라 한무대에 올랐다는 것이지만, 두사람의 인연은 참 묘하다.
뒤에 밝혀지겠지만 휴 마세켈라가 폴 사이멀의 공연에 참여한 것은 정치적으로 상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공연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이런 역할을 한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공연 중간에서 <Under African Skies>를 부를 때 폴사이먼과 듀엣을 한 미리엄 마케바다. <Graceland>를 녹음할 때는 린다 론슈태드가 맡았던 역할이다. 휴 마세켈라는 미리엄 마케바와 한때 부부사이였고, 이들의 국적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공연 당시 고국에 입국할 수 없었다. 공연이 열린 짐바브웨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인데도 말이다. 이렇게 고국을 코앞에 두고 공연을 하면서 고국에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인물이 어떤 인생 역정을 거쳐왔는지 궁금해진다.
     1939년생인 마세켈라는 재즈광인 아버지가 모아놓은 음반 덕으로 일찌감치 디지 길레스피와 클리포드 브라운등 미국 재즈음악인들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1959년 피아니스트 압둘라 이브라힘 Abdullah Ibrahim 등과 결성한 재즈 이피슬스 Jazz Epistles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최초로 LP를 레코딩한 흑인 밴드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1960년 3월 평화시위를 벌이던 아프리카인 69명을 학살한 샤르페빌(Sharpeville) 사건이 발생하고, 10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를 금지하는 등 인종차별 정책이 노골화되자 그가 택한 것은 유학이자 망명이었다. 그 생활이 30년 동안 계속될 줄은 몰랐겠지만.
     런던을 거쳐 뉴욕으로 간 마세켈라는 디지 길레스피, 존 댕크워스, 해리 벨라폰테 등 미국의 흑인 음악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맨해튼 음악학교에 다녔다. 미국의 재즈 뮤지션들과 교류하는 것과 더불어, 이미 미국에 가 있던 미리엄 마케바와 함께 밴드를 결성하여 많은 레코딩을 남겼다. 특히 <Grazing in the Grass>(1968)가 수록된 음반은 전세계적으로 400만 장이 판매되었고, 이후 공연과 페스티벌이 손쉽게 매진되는 국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 이후 마세켈라의 음악은 좀더 에쓰닉한 월드 퓨전의 방향을 취하게 된다. 기니, 라이베리아, 가나, 자이레 등을 돌며 음악 순례를 한 그는 1973년 나이지리아에 가서 펠라 쿠티와 만난다. 펠라의 밴드에서 트럼펫을 연주하기도 한 그는 펠라가 소개해준 가나의 밴드 헤졸레 사운즈 Hedzoleh Soundz와 함께 5년 동안 공연과 레코딩 작업을 했다. 1978년에는 미국의 뮤지션 허브 앨버트 Herb Albet와 공동 작업으로 앨범을 발표하는 등 팝에 가까운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 휴 마세켈라는 고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1980년 12월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둘러싸인 독립국 레소토에서 미리엄 마케바와 함께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여기 모인 7만5,000여 명의 청중중에는 그들을 보러 국경을 건너온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동포들도 많이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81년 보츠와나에 정착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경계를 이루는 국경 지대에 이동식 녹음실을 설치하고, 당시 그의 밴드인 칼라하리 Kalahari와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 뮤지션들의 녹음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85년 '공산주의자들의 테러 캠프를 박멸한다'는 명목으로 기습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방위군이 그의 동료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는 다시 영국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이런 고초 가운데서도 <Bring Back Nelson Mandela, Bring Him Back Home to Soweto>(1986)라는 곡을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폴사이먼의 월드 투어에 참가하여 조국 인근의 나라인 짐바브웨를 찾은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90년 만델라의 석방과 더불어 '몸은 해외에 있었지만 영혼은 단 1초도 고국을 떠난적이 없었다"는 마세켈라의 말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고국의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 휴 마세켈라는 나이지리아의 펠라 쿠티, 콩고의 프랑코 루암보 마키아디 등과 더불어 20세기의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음악인이다. 이들은 단지 음악인이 아니라 20세기 후반 아프리카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살아온 인물들이다. 휴 마세켈라의 경우 온몸으로 부딪친 현실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타운십 재즈에서 여러 자이브까지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나라들 가운데 산업화와 개발이 가장 잘 이루어진 곳이며, 1인당 GNP가 3,000달러를 넘는 곳이다. 그렇지만 이건 경제적 관점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로 유명했던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제도적 인종차별이 존재한 나라로 악명 높았을 뿐이다. 즉,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른바 아파르트헤이트의 대명사였다. 영어의 'apartness' 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이 단어는 인종차별의 상징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회국이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한 이유는 이곳이 이른바 정착민 지배(settler rule)를 실시한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정착민 지배란 본국에서 파견된 관리나 선교사에 의한 직접 지배(direct rule)가 아니라 이곳에 이주하여 정착한 사람들에 의해 식민지배가 행해지는 것을 말한다. 영국, 포르투갈, 독일, 네덜란드에서 이주해 온 정착민이 이곳을 식민지로 개척한 것이다. 즉,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토로 이주했던 유럽인은 나이지리아나 콩고에 관리로 파견된 사람보다는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떠난사람에 가깝다. 17세기부터 영국인보다 먼저 남아프리카를 식민지로 개척한 네덜란드인, 이른바 보어인이 스스로를 아프리카러(Afrikaner)라고 불렀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이건 마치 미국으로 이주한 영국인이 자신들을 아메리칸이라고 부른것과 비슷한 것이다.
     물론 남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정착민 식민지는 선주민들을 말살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해 왔기 때문에 유럽에서 이주한 정착민이 사회의 다수를 이루었다.반면에 남아프리카에서는 토착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에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 결과 유럽에서 이주한 정착민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정책과 제도를 고안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당연히 토착 아프프리카인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을 낳았다. 특히 19세기 말 다이아몬드와 금 등 풍부한 광물자원이 발견되자 많은 수의 아프리카 토착민들은 다이아몬드와 금을 캐는 광산에서 힘겨운 노동을 해야 했다. 또한 광산의 이권을 둘러싸고 두 차례에 걸쳐 보어인과 영국인 사이에 악명 높은 보어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백인들 사이의 이전투구로서 ,20세기가 제국주의 전쟁의 세기가 될 것임을 예견하는 사건이었다.
     정착민 식민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뿐만 아니라 남부 아프리카의 전반적 특징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2차 대전 후 형식상 독립국이었지만 소수의 지배 아래 있었고, 나머지 다섯 나라는 식민 본국과 정착민의 연합 지배 아래 있었다. 짐바브웨(영국), 잠비아(영국), 앙골라(포르투갈), 모잠비크(포르투갈), 나미비아(남아프리카 공화국: 1차 대전 이전에는 독일) 등이 그 예다. 그래서 대다수의 아프리카 나라들이 독립을 달성한 1960년대 말까지 식민지배가 이어진 여섯 나라 가운데 다섯 나라가 남부 아프리카에 있었다. 바로 위에 언급한 나라들 가운데 1964년 독립을 달성한 잠비아를 제외한 나머지다.
     1970년대 이후에는 이 나라들도 서서히 독립을 달성한다. 1975년에는 앙골라와 모잠비크, 1980년에는 짐바브웨, 그리고 1990년에는 나미비아가 각각 독립국이 되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정착민 식민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94년에 비로소 소수의 지배를 청산하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한다. 그래서 1994년은 한세기 전에 시작된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이 완전히 종식된 해로 기록된다. 뿐만 아니라 27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90년에 석방된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해이다.
     1948년 우익 정당인 국민당(NP)이 선거를 통해 집권한 이후 전개된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 이야기는 생략한다. 리처드 아텐보로 Richard Attenborough 감독의 <Cry Freedom>(1987)과 존 애빌슨John G. Avildsen 감독의 <The Power of One> 같은 영화를 보면서 저게 사실일까' 하는 의문을 품을 뿐이다. 특히 1977년 9월 의문사를 당한 흑인 해방운동의 젊은 지도자 스티븐 비코 Steven Biko의 이야기를 다룬 <Cry Freedom>은 무시무시하기까지 하다.
     피터 가브리엘이 비코에 관해 만든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볼 뿐이다. 피터 가브리엘은 1988년 넬슨 만델라 고희 기념공연, 1994년 우드스톡페스티벌등의 메가 이벤트 때마다 이 노래를 열창했다. 특히 넬슨 만델라 고희 기념공연에서는 유쑤 은두르와 함께 불렀다.

     마라비에서 타운십 자이브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음악은 이곳에 거주하는 민족만큼이나 다양하다. 흑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구는 대체로 반투(Bantu)족에 속하지만 줄루(Zulu), 호사(Xhosa), 소토(Sotho) , 츠와나(Tswana) , 바페디 (Bapedi) 등으로 매우 다양하며, 백인의 경우도 네덜란드계, 영국계, 독일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아시아계와 각종 혼혈의 비율도 여타 아프리카 나라들에 비하면 높은편이다. 영어와 줄루어를 포함하여 공용어가 11개가 된다는 점이 이런 다양성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이런 다양성을 관통하는 특징이 있다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음악은 현대화 및 산업화의 전개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이라는 두 축을 따라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중음악은 미국의 대중음악, 특히 흑인 음악을 닮은 면이 많다. 조금 뒤에 차근차근 살펴보겠지만 마라비(marabi)는 재즈와, 음부베(mbube)는 두웝 (doowop)과. 음바쾅가(mbaquanga)는 로큰롤과, 크와이토 (kwaito)는 힙합과 각각 유사한 면을 갖는다.
물론 미국 흑인 음악, 이른바 아프로아메리칸의 음악은 다수의 백인에게 지배받는 소수 흑인의 문화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음악은 소수의 백인에게 지배받는 토착 흑인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음악은 다른 아프리카 지역의 복잡하고 싱커페이션 많은 폴리리듬과 달리 4분의 4박자의 하드 드라이빙'한 리듬이 기본적이고, 다른 아프리카 지역의 음악에서는 찾기 힘든 화성과 합창의 비율이 높다. 여기에는 백인 인구의 비율이 높다보니 서양(유럽)의 음악이 일찍 뿌리내렸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 남아프리카는 서양 (유럽) 악기, 예를 들어 페니휘슬(틴 휘슬), 바이올린, 색소폰, 아코디언,
기타등이 가장 먼저 전파되어 토착화된 나라일 것이다. 즉, 이런 악기들을 사용하는 흑인 음악은 아프리카의 다른지역에서는 듣기 힘들다.
  폴 사이먼이 1984년경 <Gumboots : Jive Hits, Valume lI>를 듣고 "1950년대 애틀랜틱 레코드 유파에서 나온 1950년대의 로큰롤처럼 들렸다‥‥‥ 친숙함과 동시에 낯설게 들렸다"고 말한 것이 남아프리카 대중음악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해줄 것이다. 단, 폴 사이먼이 '애틀랜틱 레코드 유파에서 나온 1950년대의 로큰롤'이라고 칭한 것은 R&B나 소울이라고 해야 혼동이 덜할 것이다. 로큰롤을 (미국의) 백인 음악이라고만 이해하는사람이 많기 때문에‥‥ 뒤에 폴 사이먼은 이 음악이 음바쾅가 또는 타운십 자이브(townshipjive)라고 부르는 음악이며, 소웨토 거리의 댄스 음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폴사이먼의 <Graceland : The African Concert>에서 오프닝 곡의 제목도 <Township Jive)였다. 음바쾅가와 자이브는 음악 스타일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일것이다 .
   타운십은무엇이고 소웨토라는 지역은어디일까, 티운십이란 흑인과 유색인종의 격리 거주지역을 말하고, 따라서 아파르트헤이트의 대명사였다. 미국의 흑인 게토와 유사하겠지만 격리가 제도적이라는 점에서 질적 차이가 있다. 소웨토는 타운십의 하나로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곳이다. 1976년과 1985년에 인종차별 정책을 규탄하던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곳이 바로 소웨토다.
     음바쾅가 또는 타운십 자이브는 1960년대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 Ladysmith Black Mambazo의 음부베와 더불어 국제적으로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대표하는 음악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모든음악이 그렇듯 음바쾅가와 음부베에 대해서도 '스토리'가 많다. 이제 그 역사를 알아보자.
    미국 흑인 음악과 형식이나 스타일이 유사한 점, 그리고 마세켈라의 재즈뮤지션 경력에서 추측할 수 있듯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미국 흑인 음악에 대한 '짝사랑'으로 유명하다. 짝사랑이라는 표현은 지금 출처를 찾을수 없는 한 평론가의 말이었다. 어쨌든 남아프리카에는 1920년대부터 재즈와 유사한 마라비라는 스타일이 존재했다. 물론 아프리카의 모든 음악 문화가 그렇듯 순수한 모방이 아니라 변형의 과정이 있었다. 마라비는 딕시랜드 재즈의 영향을 흡수하고 줄루, 호사, 소토 등 각 민족의 전통음악을 혼합한 스타일이었다. 트럼펫 연주자 휴 마세켈라나 피아노 연주자 압둘라이브라힘처럼 국제적으로 유명한 남아프리카 출신의 재즈음악인들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은아니다.
     마라비는 타운십 재즈(township jazz)라는 말과 거의 혼용되지만, 전통음악의 분위기가 강한 마라비와 도회적이고 현대적인 타운십 재즈를 구분할 때도 있다. 타운십 재즈의 경우에도 각 타운십 거주자들의 뿌리를 이루는 민족의 음악적 언어적 전통이 남아 있는 음악이었다. 불행히도 1948년에 집권한 국민당이 1950년에 실시한 그룹 에어리어 액트 (Group Area Act)에 의해 타운십 재즈는 질식당하고 만다. '다른 인종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함께 거주할 수 없다'는 조치에 따라 농촌과 도시를 막론하고 그때까지 존재하고 있던 커뮤니티들이 해체되고 주민들이 강제로 재배치된 것이다.
이런 암흑기이자 과도기에 발전한 음악은 크웰라(kwela) 또는 페니휘슬 자이브(pennywhistle jive)였다. 크웰라 음악인들은 타운십에서 대도시의 도심으로 진출하여 길거리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10대 청소년이 많았고, 이들이 쓰는 기타나 베이스도 임시변통으로 만든 것이 많아서 크웰라 음악인의 이미지는 부랑자 같았다. 크웰라의 악기로는 기타와 베이스 외에 두세 개의 페니휘슬이 사용되어서 페니휘슬 자이브라는 이름이 붙었다. 페니휘슬을 사용한다는 점은 남아프리카의 음악에서 '유럽(백인)의 영향과 자이브라는 용어가 남아프리카 음악을 전반적으로 관통하는 정서나 분위기를 지칭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우리는 비지스 The Bee Gees가 디스코로 최초로 전향한 곡 <Jive Talkin'> 때문에 자이브를 디스코의 한 갈래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나를 포함하여) 많겠지만.
  한편 상이한 인종이 강제로 격리되던 1950년대 상황에서도 티운십 내에 있는셔빈(shabeen)이라고 불리는 주점에서는 서로 다른 인종의 사람들끼리 교류하는 일이 생겨났다. 그래서 셔빈은 불법으로 지정되었지만, 여기 모인 노동자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것이나 악기 삼아 춤을 추고 놀았다. 이렇게 여러 민족의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뒤섞이다보니 연주 스타일도 뒤섞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불법 주점인 셔빈이 문화적 용광로의 구실을 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직업 음악인들이 기타, 아코디언, 북, 페니휘슬 등 정식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잼 세션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스타일을 타운십 자이브라고 통칭하게 되었다.
  음바쾅가와 음부베, 세계시장에 나서다
     음바쾅가와 음부베
     1950년대의 한 시점에 페니휘슬이 색소폰으로 대체된 것이 크웰라로부터 음바쾅가로의 이행을 상징할 것이다. 1960년대 이후에는 일렉트릭 베이스와 일렉트릭 기타도 서서히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음바쾅가가 처음부터 신뢰받는 음악이었던 것은 아니다. 음바쾅가라는 단어가 영어로 덤플링(dumpling)이라고 부르는 패스트푸드의 일종인 고기만두에서 유래한 것처럼 음악산업은 신속히 만들어서 높은 수익을 올리는 음악'을기대했다. 그래서 타운십 자이브를 그대로 음반에 녹음하기보다는 스튜디오의 세션 밴드에게 연주를 시켰다. 그 결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타운십의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사이의 괴리가 컸다. 그래서 초기의 음바쾅가는 교양 있고 의식 있는 흑인들이 외면하는 음악이었다.


그렇지만 사태가 음악산업의 기대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에도 맨해튼 브라더스 Manhattan Brother와 스카이라크스 Skylarks는 인기 있으면서도 신뢰받는 노래를 선보였다. 특히 스카이라크스의 멤버였던 미리엄 마케바는 가수 활동과 더불어 뮤지컬 <King Kong>과 영화 <Come Back Africa>에 출연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Pata Pata>, <The Click Song> 같은 아프리카 음악의 고전들을 국제적으로 알림과 더불어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현하던 그녀는, 1960년대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 당국으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한 채 미국에 머물게 된다. 망명 생활 중에 그녀는 미국의 흑인 운동가인 스토클리 카마이클 Stokely Carmchael과 재혼했고, 이후 '마마 아프리카(Mama Africa)' 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1960년대 이후 음바쾅가의 새로운 단계를 나타내는 인물은 '소웨토의 사자'라는 별명을 가진 말라티니 Mahlathini(1938~2001 : 본명은 Simon Nkabinde Mahlathini)다. 신음(groaning)'이라고 종종 표현되는 말라티니의 보컬은 줄루족 전통음악의 가창 스타일을 대중음악에 도입한 것이었다. 말라티니의 새로운 가창 스타일, 3인조 여성 중창단 마호텔라퀸스 The Mahotella Queens의 하모니와 춤, 그리고 마코나 촐레 밴드 Makhona Tsohle Band의 악기 연주가 삼위일체를 이루어 음바쾅가는 전통적 스타일을 현대적 사운드와 결합시킬 수 있었다. 마호텔라 퀸스는 누가 보아도 슈프림스 The Supremes를 연상시키는 재능 있는 여성들이었고, 마코나 촐레 밴드(Jack-of-all-trades라는 뜻이다)의 리더인 웨스트 은코시 West Nkoti는 이후 오랫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음악적 경향을 선도한 연주인이었다 한 예로 1980년대 음바쾅가의 새로운 스타가 된 시포 마부제 Sipho Mabuse가 불러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비공식적 송가가 된 <Jive Soweto>도 은코시와 함께 녹음한 것이었다.
     1970년대부터 음바쾅가의 보컬은 여성 중창보다는 남성 솔로에 중점을 두면서 도회적 음악을 대표하는 장르가되었다. 미국에서 로큰롤이라는 범주가 그렇듯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발생하는 음악적 혁신들을 포식하는 범주가 된 것이다. 음악산업의 작위적 작명으로 출발한 태생의 오점에 비하면 행복한 운명을 맞은 셈이다. 쿵쿵거리는 베이스와 드럼의 비트, 재즈와 록의 악기 편성, 선창과 후창의 보컬, 복잡하고 정교한 화성등이 음바쾅가의 전형적 특징이 되었다.
   말라티니는 음바쾅가를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샘플러 음반<The Indestructible Beat of Soweto>(1985)에 두곡을 수록한 뒤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87년 말라티니의 이름으로<The Lion of Soweto>를 국제적으로 배급했고, 말라티니 앤 마호텔라 퀸스라는 이름으로 세계 각지에서 공연을 가졌다. 불행히도 1998년 은코시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2001년에는 말라티니가 사망하면서 이제 그들의 에너지 넘치는 공연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The Indestructible Beat of Soweto>에 참여한 음악인 중에는 말라티니와 더불어 국제적 주목을 받은 존재가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조셉 샤발랄라 Joseph Shabalala가 이끄는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라는 그룹이다. (레이디스미스는 조셉 샤발랄라의 고향 지명이다), 이들은 악기를 연주한 그룹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보컬 그룹이자 아카펠라 중창단이다. 줄루족의 음악 전통에 기원을 둔 5부 합창으로 연주되는 이들의 음악은 낮은 음을 풍성하게 내는 베이스 성부와 특정 부분에서 꾸르륵거리는 특유의 창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 성부의 하모니가 만들어내는 풍부한 텍스처가 인상적이다.
음바쾅가보다 오랜 전통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이 음악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에서는 이스카타미야(iscathamiya)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국제적으로는 줄루어로 '사자' 라는 뜻의 음부베로 널리 알려졌다. 이유는 1940년대에 솔로몬 린다 Solomon Linda가 작곡한 <Mbube>라는 곡이 미국으로 건너가 <Wimoweh>라는 이름을 달고 줄루족의 포크 음악(민속음악)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Wimoweh' 란 'mbube'가 당시 미국인들의 귀에 들린 발음이었다.
    한 곡에 대한 복잡한 사연을 소개한 것은 음부베가 음바쾅가와 달리 전통 민속음악으로 알려졌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는 국제적으로는 물론이고 국내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즉, 상업적인 대중음악으로 천대받던 음바쾅가와 달리 음부베는 남아프리카의 흑인 가운데 교양 있는 성인들이 좋아하는 음악이었다. 아마도 남아프리카 음악을 월드 뮤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비슷할 것이다. 이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양한 음악에 대한 담론은 1980년대 이후 더욱 풍성해졌다.

     <그레이스랜드> 논쟁
     폴사이먼의 <Gaceland>가 팝 음악의 영역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음악을 도입한 역작이라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음반을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티스트들, 특히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가 국제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폴사이먼 개인의 음악적 성취로는 훌륭한 작품이었음에도 다른 모든 점에서는 논란 많은 텍스트가 되었다. 당시 그에게 가해진 비판은 세 가지 차원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비판은 정치적 차원이다. 폴사이먼이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때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강도 높게 전개 되던 무렵이었다. 미국 의회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경제제재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를 무시한 폴 사이먼의 행동은 구설수에 올랐다. 본인은 자신의 작업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라고 말했지만 논란은 그치지 않았다.
   두번째 비판은 경제적 차원이다. <Gaceland>에 실린 음악은 남아프리카음악을 도입한 것이라고 홍보되었고 실제로 이곳의 리듬에 많이 빛지고 있음에도불구하고 (<Homeless) 한 곡의 공동 작곡을제외하고) 저작권은 폴 사이먼에게 있었고, 따라서 수백만 장의 판매고에 따른 수입은 고스란히 폴 사이먼에게 귀속되었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제3세계는 원료를 값싸게 공급하고 선진국은 이를 가공하여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높은 부가가치를 올리는 국제무역의 패턴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비판이 있었다.
   세 번째 비판은 문화적 차원이다. 앞에서 언급한 <Gaceland : The African Concert>의 공연 장면을 보면 폴 사이먼은 많은 수의 아프리카 음악인들로 구성된 밴드와 합창단을 통솔하면서 공연을 진행한다. 즉, 작은 백인 한 명이 여러 흑인들을 지도하는 시각적 효과를 주는데, 이 점에 대해 수세기 전 백인 식민주의자가 아프리카의 흑인을 계몽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런 '그레이스랜드 논쟁'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정치적, 미학적 판단력에 의존할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Gaceland>를 다시 한 번 들으면서 음악적으로'평가를 내려보고 싶다. 먼저 이 음반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비롯한 남부 아프리카의 다양한 음악을 흡수하고 있는데, 그 범위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넓다. 그러니 한곡 한곡 살펴보자. 이렇게 조목조목 설명하는 이유는 남부 아프리카 음악의 큰 줄기만 보았을 뿐 자잘한 갈래는 보지 못하고 있는점을 보완하기 위한것이다.
  먼저 <Gumboots>는 타운십 자이브(와 음바쾅가), <Homeless> 음부베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곡들이다. 한편 <Diamonds on the Soles of Her Shoes>는 타운십 자이브의 리듬과 음부베의 합창이 섞인 곡이다. 또한 <You Can Call Me Al>은 음바쾅가에 기초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적인 훵키한 댄스 리듬을 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페니휘슬 연주도 등장한다. 이 앨범에서 두 곡이 가장 히트한 것은 이런 혼합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머지 곡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타운십이나 대도시에서 대중적인 음악과는 조금씩 편차가 있다. 첫 트랙인 <The Boy in the Bubble>은 레소토 출신의 그룹 타오 에아 마체카 Tao Ea Matseuia와 함께, <I Know What I Know>는 샹안(Shangaan)족 그룹인 가자 시스터스 Gaza Sisters와 함께 작업한 것이다. 레소토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토 안에 있는 소토족 중심의 독립국이고, 이들의 음악은 중간 템포의 리듬과 아코디언이 이끄는 사운드를 가지고 있어서 줄루족의 음악 전통과는 또 다르다. 또한 가자 시스터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북부 출신이지만 샹안족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나라는 모잠비크이고, 따라서 이런 스타일의 음악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소수민족의 음악에 속한다.
   한편 <Under African Skies)는 줄루족의 전통적인 워킹 리듬에 기초한 곡이라고 하지만, 멜로디가 매우 미국적이라서 남아프리카의 느낌은 그리 강하지 않다. <Crazy Love>는 이 음반의 여러 곡에서 연주를 들려준 레이 피리 Ray Phiri가 기타를 맡았는데, 이 곡에서는 연주스타일이 부드럽고 정교해서 (조금 있다 살펴볼) 짐바브웨나 말라위의 음악과 비슷하게 들린다. 그리고 이 앨범에 수록된 세 곡은 남아프리카의 음악과 별다른 관계가 없다. <Gaceland>는 미국의 컨트리 스타일이고, <That Was Your Mother>는 자이데코 스타일이고, <All Around the World or the Myth of Fingerprints>는 텍스-멕스 스타일이다(자이데코와 텍스-멕스에 대해서는 제12장에서 설명될 것이다).
   나아가 이 음반에 참여한 음악인들은 남부 아프리카권에 국한되지도 않는다.<Gaceland>의 경우 페달 스틸 기타를 연주한 사람은 나이지리아(즉, 서아프리카)의 주주 음악인 킹 서니 아데의 밴드 멤버인 데몰라 아데포주 Demola AdePoju이며 , <Diamonds on the Soles of Her Shoes>에는 세네갈(역시 서아프리카) 출신의 유쑤 은두르와 그의 밴드에 있는 타악기 주자 두 명이 참여했다. 또 <You Can Call Me Al>에서 페니휘슬을 연주한 인물은 미국에 거주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적의 백인 모리스 골드버그 Moris Goldberg였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볼 때 당연한 말이겠지만 <Gaceland>는 미국의 음악인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음악을 연주한 음악이 아니고, 미국의 음악인과 남아프리카음악인 사이의 퓨전을 시도한 음악도 아니고, 남아프리카 지역의 여러 갈래 음악에서 자양분을 섭취하여 만든 미국의 대중 음악이다. <롤링 스톤>에서 이 음반의 의미를 '아프리카 리듬을 이용하여 아메리칸 멜로디를 확장한 것' 이라고 지적한 것은 정확해 보인다. 그래서 폴사이먼의 음악은 예술적 가치는 훌륭하지만 문화적 가치는 사소한것이 되었다. 음반에 수록된 곡들에 남아프리카이 현실을 다룬 메시지가 없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담은 음악을 추구한 백인 음악인은 따로 있었다.

     조니 클레그의 음바쾅가 록
   조니 클레그 Johnny Clegg(1953~)는 영국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정착한 백인 정착민이다. 그가 1976년에 결성한 줄루카 Juiuka는 1979년 데뷔 앨범 <Universal Men>을 발표하면서 1986년 해체할 때까지 넓고도 깊은 파장을 미쳤다. 파장이 넓고도 깊은 이유는 줄루카의 또 다른 멤버인 시포 음쿠누 Sipho Mchunu가 줄루족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둘이 처음 만났을때 음쿠누는 클레그의 이웃에서 정원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지만,그때 이미 직접 만든 기타를 독학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줄루카는 인적 구성뿐만 아니라 음악 자체가 인터컬처럴(intercultural)했다는 점에서 모범적인 그룹이었다. 음쿠누는 클레그에게 기타 주법과 줄루족의 전통 노래, 춤, 언어를 가르쳐주고, 클레그는 음쿠누에게 영국과 아일랜드의 포크 음악과 록 음악의 어법을 가르쳐주는 식이었다. 그 결과 줄루카의 음악에는 서양의 록 음악(포크 록)과 줄루족의 전통음악이 평등하게 결합되어 있고, 영어와 줄루어 가사가 평등하게 나온다. 이들의 음악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었으며, 1983년에 나온 세 번째 앨범 <Scatterlings>부터는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줄루카는 결코 정치적으로 저항하는 밴드가 아니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줄루카의 가사는 사회적으로 예민한 사건을 다루었다. 1982년에 발표한 <Siyayilanda>는 노동조합 지도자 닐 아게트 Niel Agett가 옥중 사망한 사건을 노래한 것이었고, 같은 해에 발표된 <Mdantsane>는 음단차네 타운십에서 일어난 버스 보이콧 사건을 다룬 것이었고, 1984년에 발표한 <Work for All)은 그해의 실업사태에 대해 발언한 것이었다. 그 사이에 이들의 앨범 다섯 종은 골드 레코드가 되었고, 그가운데 두종은 플래티넘 레코드가되었다. 'juluka'가 줄루어로 '땀'을 뜻하는 단어라는 점이 중의적으로 다가온다.
    1985년 음쿠누가 고향의 농장으로 돌아가면서 줄루카는 해체되었고, 조니 클레그는 자신의 밴드 사부카 Savuka를 만들어 활동을 계속했다. 사부카는 줄루카에 비해 팝 성향이 강한 음악을 했지만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계속 담았다. 나아가 국제적 인기는 더욱 높아졌는데 사부카는 미국에서 스티브 윈우드 Steve Winwood, 캐나다에서는 조지 마이클 George Michael 공연에서 오프닝 밴드 역할을 맡으면서 월드 투어를 벌였다. 또 네 번째 앨범인 <Heat, Dust And Dreams>(1993)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베스트월드 뮤직'으로 지명되었고, 빌보드 시상식에서 '베스트 월드 뮤직 앨범' 부문을 수상했다. 이 무렵 조니 클레그는 <The Power of One> 사운드트랙에서 테마곡인 <The Power of One>을 작곡하고, <Senzenina>의 편곡을 맡기도 했다. 불행히도 한스 짐머의 오리지널 스코어와 프로듀싱은<The Lion King>과 그리 다를 바 없는것이었지만.
1997년 클레그와 음쿠누는 재결합했고 국내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이때의 공연은 20년 전처럼 살벌한 분위기에서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하지 않고 자축하는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다름 아니라 1990년 석방된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 민족회의 (ANC) 의장이 1994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언을 고했기 때문이다. 이는 조니 클레그와 시포 음쿠누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미리엄 마케바와 휴 마제켈라는 마치 망명했던 여왕이나 왕이 돌아오는 것처럼 귀국했고,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남아프리카의 음악인들' 이라는 재야 운동 단체를 이끌던 시포 마부제 같은 음악인은 이제 '남아프리카 음악인연맹' 이라는 공식 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1994년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정상적인 나라가 되었고, 대중음악과 음악산업도 정상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시절을 보내는 세대가 이전 세대의 음악을 즐겨 들을 리는 없다. 이미 1980년대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이본 차카 차카 Yvonne Chakachaka 같은 디스코 디바나 러키 두베 Lucky Dube 같은 레게 스타처럼 서양음악으로 젊은 층에게 인기를 누린 가수들이 존재했다. 물론 이들도 남아프리카의 문화적 뿌리를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댄스 클럽을 중심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크와이토도 마찬가지다. 크와이토는 1980년대 남아프리카에서 인기를 누린 디스코에 영국과 미국에서 전파된 힙합, 하우스, 레게가 뒤섞인 스타일인데, 아바샨테 Abashante, 아서 Arthur 같은 스타들도 탄생시키고 있다. 앞서 휴 마세켈라가 <Johannesburg>에서 16세의 래퍼를 기용한 것도 크와이토의 움직임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음악들도 흥미롭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월드 뮤직)에서는 조금 벗어나 보인다. 그러니 남아프리카공화국 여행은 이 정도로 그치도록 하자. 하지만 아직도 갈길이 멀다.
  짐바브웨 해방전쟁의 음악, 치무렝가
   이제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보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쪽 국경을 넘으면 짐바브웨다. 앞서 폴 사이먼의 공연이 열렸던 곳이고, 1980년까지는 잠비아와 병합되어 로디지아 <Rhodesia>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악명 높은 식민통치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12세기에서 15세기까지는 대짐바브웨 왕국(Great Zimbabwe)으로 불리는 거대한 왕국을 건설했던 곳으로 지금도 150여 개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짐바브웨의 주요 민족인 쇼나(Shona)족의 왕국이었다.
   짐바브웨의 음악은 1980년대 후반 음바쾅가 이후 남아프리카권 음악의 '넥스트 빅 씽(Next Big Thing)'으로 여겨졌다. 분두 보이스 The Bhundu Boys가 1988년에 아일랜드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영어 앨범 <True Jit>는 국제시장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BBC의 권위 있는 DJ 존필 John Peel 이 "내가 들었다고 기억하는 음악 가운데 가장 흐름이 강하고 자연스러운 음악"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불행히도 국제적 평가와 국내의 반응은 일치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한 아티스트의 일반적 운명인지 이때 이후 이들의 활동은 이전만큼 화려한 조명을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있다.
   분두 보이스의 음반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쉬지 않고 진행하는 댄스 리듬이지만, <My Foolish Heart> 같은 몇몇 트랙에서는 최면적이고 주술적인 악기음이 들려온다. 음비라(mbira)라는 이름의 악기가 그것이다. 음비라는 중부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많이 사용되는, 손으로 연주하는 피아노(hand piano)다. 호쇼(hosho)라는 딸랑이(rattle), 그리고 음비라보다는 익숙한 마림바(marimba) 소리도 가끔 들린다. 쇼나족의 이런 전통악기들은 비라(bira)라고 불리는 종교 의식에 뿌리를 둔 것으로 조상들을 불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전통 음비라 음악을 들으려면 스텔라 키웨세 Stella Chiwese 같은 '음비라의 여왕'을 찾아보라는 권고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음비라는 식민지 시기 동안 저항의 상징이었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배자들이 전통음악을 미개하다고 탄압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 음비라 음악에 머물지 않고 전기 기타로 음비라의 효과를 내고, 심벌로 호쇼의 효과를 내는 사운드를 개발했는데 대표적 인물은 토머스 맙푸모 Thomas Mapfumo와 올리버 음투쿠지 01iver Mtukudzi 같은 짐바브웨 음악의 거인들이다. 드레드록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연주하는 이들의 음악은 '해방전쟁' 이라는 뜻의 치무렝가(chimurenga)라고 부른다. 이들은 쇼나어로 가사를 쓰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때로는 쇼나족의 속담을 인용하여 풍자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오, 할머니 /오, 어머니 , 오,' 아이야/숲 속에 뱀이 있다/엄마는 괭이를 들고/할머니도 괭이를 들고/아이는 도끼를 든다'는 식으로.


     그렇다면 분두 보이스의 지트(jit) 음악의 '반짝 성공'은 그들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짐바브웨 음악의 국제적 전파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990년 버진에서 컴필레이션 음반들<Zimbabwe Frontline>을 발표했고 이후 각 아티스트들의 독집 음반들도 소개되면서 짐바브웨의 음악이 새롭게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짐바브웨의 대중음악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음바쾅가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음비라음악의 영향을 받은 순환적(cyclical) 기타 리프, 부드럽지만 정교하고 복잡한 리듬, 장시간에 걸친 연주로 독자적 영역을 보장받았다. 복습을 겸해 말하면 음바쾅가는 하드 드라이빙한 4분의 4박자의 리듬과 비교적 짧은 곡 길이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하라레 밤거리의 맥주 클럽에서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스태미나 넘치는 마라톤 연주가 계속되고 있다. 비록 밴드들 대부분이 자신의 악기와 장비를 갖지 못하고 클럽이 소유한 것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지만.
    그런데 짐바브웨 음악이라고 분류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음바쾅가 이외에 또 하나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Zimbabwe Frontline Vol.2 : Spirit of the Eagle>"의 첫 트랙인 롭슨 반다 앤 뉴 블랙 이글스 Robson Banda & New Black Eagle의 연주를 들으면 왠지 쿠바 음악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물론 관악기나 퍼커션은 사용하지 않고 기타 밴드가 연주하는 사운드지만. 한편 <The Rough Guide to Zimbabwe>에 수록된 리얼 사운즈의 연주를 들으면 이런 생각이 더욱 짙어진다. 이들을 포함하여 짐바브웨에서 활동하는 룸바 밴드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짐룸바 (zimrumba) 또는 룸비라(rumbira)라고 부른다. 짐바브웨의 룸바 또는 룸바+음비라라는 뜻의 조어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리얼 사운즈의 멤버들은 콩고(옛 자이르)에서 이주하여 짐바브웨에 눌러앉은 존재들이다. '아니나 다를까'라는 표현을 쓴 것은 콩고가 룸바의 제2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아니 쿠바음악이 콩고의 후예들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제2의 고향이 아니라 제1의 고향일 것이다. 짐바브웨에서 잠비아를 거치면 이 '고향' 에 이르게 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Alan Shavarsh Bardezbanian-Oud Masterpieces

  • 파호
  • 2014-01-18
  • 조회 수 1808

West Africa 음악(신현준님글)

  • paho
  • 2005-09-05
  • 조회 수 4661

켈틱 음악 & 아일랜드 포크(아일랜드 음악)-신현준님 글

  • paho
  • 2005-09-05
  • 조회 수 6614

FADO(파두)

  • paho
  • 2005-09-05
  • 조회 수 5266

Bossa Nova(보사노바)

  • paho
  • 2005-09-05
  • 조회 수 4340

레게음악

  • paho
  • 2005-09-05
  • 조회 수 5324

아프리카 음악

  • paho
  • 2005-09-05
  • 조회 수 5225

CANZONE(깐쪼네)

South Africa(신현준님글)

  • paho
  • 2005-09-05
  • 조회 수 4286

Salsa(살사)

  • paho
  • 2005-09-05
  • 조회 수 4105

Tango(탱고,땅고)

  • paho
  • 2005-09-05
  • 조회 수 5148

안데스음악 잉카의 후예인 인디오들의 음악

  • paho
  • 2005-09-05
  • 조회 수 5896

러시안 락음악

  • paho
  • 2005-09-05
  • 조회 수 4925

집시의시간을 찾아 떠나는 동유럽기행(신현준님글)

  • paho
  • 2005-09-05
  • 조회 수 55091

중국문화와 한국

  • paho
  • 2005-09-05
  • 조회 수 3889

인도네시아

  • paho
  • 2005-09-05
  • 조회 수 4026

월드뮤직이란?

EUROVISION SONG CONTEST(유러비젼 송 컨테스트)

  • paho
  • 2005-09-07
  • 조회 수 5451

북미 인디언 음악

  • paho
  • 2005-09-07
  • 조회 수 6341

아시아의 팝 음악, 악취, 향취, 무취, 그리고 독취 (신현준님 글)

  • paho
  • 2005-09-07
  • 조회 수 4410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

X